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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이 소설을 읽으며 책 속 내용으로, 그리고 영화와 독파 챌린지에서 제시한 유튜브 영상을 보며 알게 되었지만,
미국의 1920년대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상징적인 시대였다.
미국의 1920년대를 Jazz Age와 더불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 The Roaring 20's. 돈과 에너지가 넘쳐흐르던, 광란의 20년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도,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20년대의 미국 사회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소설을 읽으며, 그리고 뒤이어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당시 뉴욕의 광적이기까지 한 '흥청망청'(?)은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뭔가 다들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냥 큰 흐름에 휩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불나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야경의 뉴욕이란 도시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개츠비는 참 복잡미묘한 인물이다.
데이지, 사랑을 되찾으려 수단방법을 가지리 않고 노력한 모습은, 처음에는 순애보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개츠비의 살아온 삶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던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데이지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 열정이란.. 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데이지를 향한 순수한 사랑만의 감정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개츠비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에 집착했다.
데이지와 헤어진 5년간 있었던 모든 일이 없던 것처럼 되기를.
그래서 '남편 톰을 단 한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데이지가 말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게 사랑만의 감정일까?
개츠비는 지난 5년,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었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현실을 개선해나가려 하기 보다, 그 모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그 문제들이 없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면, 데이지가 '지금까지 개츠비만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게, 그런 소원이 실현되는 것 같은 상징과도 같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확대하고 왜곡된 판단인 걸까.
마지막, 개츠비의 죽음과 이후 사람들의 대응은 참 슬프다.
그렇게 많은 파티를 하며 사람이 끊이지 않던 개츠비였고, 개츠비의 저택이였지만 장례식에 찾아오는 사람은 개츠비의 아버지와 닉 캐러웨이 뿐이었다.
모두가 외면했다.
그 현실이 참 비참하고 슬프다.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하루 일과표를 작성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해서 발전하고 성공하려 했던 개츠비가, 밀주업을 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부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무너졌고,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이게 바로 그 당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은 정말 탁월하다.
'위대한 개츠비'
과연 개츠비는 위대한 걸까? 아니면 반어적인 표현으로 생각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반어적인 표현 같다가도, 뭔가 모르게, 그래도 '위대한' 모습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고, 단숨에 읽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