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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편이다. 울면서 걷기도 해봤고, 넘어지며 자라는 것도 해 본 것 같다. <청춘 유감>을 통해 나의 이십 대를 추억하기도 했다.
나 또한 15년째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지만, 내가 스무 살 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서 가장 처음 들어간 곳은 교수님의 제안으로 학보사에서 기자로서 활동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글 쓰는 일은 모두 경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수습 기자부터 에디터, 프리뷰어 등 대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글 쓰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고, 우연한 기회로 대학교 2학년 때 KBS 대구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프리뷰어를 시작으로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자 한소범이란 사람은 소설가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기자라는 직업에 애정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책임감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프롤로그부터 남달랐다.
‘한소범 씨는 소설의 소재가 필요해서
기자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기자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일을 목격하고 싶습니다.
입이 없는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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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한소범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소설을 쓸 당시, 차비를 아끼기 위해 한 시간 반을 매일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
씨네 21 잡지를 즐겨봤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열정페이를 경험한 이야기, 독립 영화 촬영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의 청춘의 시간은 치열하고도 뜨거웠다. 그녀가 기자가 되기까지 겪었던 경험들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대견했다. 그 외 공공 도서관에 얽힌 에피소드, 기자 일을 하면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생각보다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직업이 기자인데
긍정적인 시선도 있지만, 부정적인 시선도 있는데 기자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녀는 아마도 열정적인 기자로서의 캐릭터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문학소녀로 불리던 그녀가 애틋하게 여겨지는건 나 또한
문학 소녀에서 방송작가로 청춘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작가나 기자를 꿈꾸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글을 잘 쓰고 싶고 계속 쓰면서 글쓰는 직업에 도전하게 되는데, 기자와 작가는 같은 듯 다른
차이점이 있다. 기자는 비교적 정규직이 있고, 작가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한다. 또한 기자는 사실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면, 작가는 감정을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닐까.
새벽 두시, 두 개의 터널을 지나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동안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는 도대체 왜 소설을 쓰고 있을까?’였다. 아무도 내게 소설을 쓰라고 한 적이 없는데,
아무도 내가 쓰는 소설을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않는데, 왜 나는 매일 새벽 한 시간 반씩 홀로 걸으면서까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소설이야말로 바로 ‘아무도 쓰라고 한 적 없는데도’ 쓸 수밖에 없어서 쓰게 되는 무엇이었다. 쓰여야만 하는데 어떤 글의 형태로도 충분하지 않을 때, 오로지 소설만이 가능한 방식처럼 느껴질 때 소설을 쓰게 된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에 그것을 알았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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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읽었던 <씨네 21>은 무엇보다 충만한 독서 경험으로 남았다. 이후에 펼쳐진 삶의 많은 변화들이 그 잡지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 p. 35
나는 이제 더 이상 시나리오나 소설을 쓰지 않는다. 하나는 한계령을 넘어오며 그만뒀고, 하나는 문학 담당 기자가 되면서 단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독립영화제에 가서 젊은 감독들이 만든 단편영화를 보고, 매년 1월 1일 발표되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는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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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직업 독서가라고 해도 온종일 앉아서 책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만나고 기사도 쓰는 도중에 틈틈이 책을 읽어야 한다.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는데, 그때 유용한 방법이 바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이다. 독서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 중 대다수가 책 한 권을 오랫동안 붙잡고 끙끙대는 경우가 많다. 한 권을 ‘정독’하고 ‘완독’해야만 완벽한 독서 행위라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독서의 장벽을 높게 설정한다. 그러다 보니 매번 앞부분만 반복해 읽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독서를 포기하거나 나아가서는 책 읽기 자체에 흥미를 잃는다. 이런 이들에게도 추천하는 독서 방법이 바로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 것이다. - p.124
- 작가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큰 자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더 이상 그 일을 좋아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일이 좋았다. 좋아해서 잘 쓰고 싶었고,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설사 그게 직업이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좋은 작품을 읽는 어느 날 아침에, 그걸 쓴 작가에게 “좋은 작품 써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문자를 보낼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작가들 역시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 일을 하며 알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팬이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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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라는 말에 상처받는 것은 이 일을 사랑해서 최선을 다해 기레기이지 않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이 직업이 모순이 많은 직업이자 대의만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번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가끔 찾아오는 작은 보람과 재미를 호사라고 생각하면서 견디는 것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 저울질하며, 겨우 균형을 잡고 있다. 나는 이제 처음 기자가 됐을 때만큼 선배들을 동경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배들도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자, 비로소 선배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아직 그만두지 않았다. p.248
같은 듯 다른 직업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감되고 애틋하다.
기자가 된 이후론 그녀가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 그녀의 치열한 청춘의 시간을 에세이로 만났으니, 다음번엔 창작의 결과물로 그녀의 신작 소설을 만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기대할게요, 한기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