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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없는 자서전-30번까지
1. 그리하여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고 동물의 집합체를 믿을수도 없었던 나는, 주변부에 속한 인간들이 그렇듯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는, 주변부에 속한 인간들이 그렇듯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거리를 데카당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당스란 무의식의 완전한 상실이고, 무의식이야말로 삶의 기분이다. 만일 심장이 의식을 갖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진작 멈췄을 것이다.(p12)
2. 그저 학식을 소망하는 자의 양심을 갖고, 감각의 책 위에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그 무엇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임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감각 안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방대한 이국땅을 탐험하듯이 감각을. 탐구한다. (p13)
3.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위해 밀짚을 엮는 죄수라기보다는 그저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베개의 수를 놓는 소녀에 가깝다.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p14)
4. 나는 낮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밤에는 나 자신이다.(p16)
5. 한심하고 이름 없는 사무원인 나는 보잘것 없는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영혼을 구원하기라도 하듯 단어들을 쓴다. 저멀리 높고 넓은 언덕위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일몰과,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얻은 조각상과, 환멸에 빠져 종교를 단념했음에도 내 손가락에 그대로 남아있는 신앙의 반지로 나를 그럴듯하게 꾸민다.(p18)
6. 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너무나 적었건만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줄기 햇살, 가까운 들판, 한줌의 평온과 한쪽의 빵,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야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p19)
7. 도라도레스 거리에 있는 이 사무실이 내개 인생을 의미한다면, 같은 거리의 내가 살고 있는 이층방은 예술을 의미한다. 그래, 예술. 인생과 같은 거리에 살되 주소는 다른 예술. 나를 삶에서 해방시켜주지만 산다는 것 자체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하고, 인생과 마찬가지로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단지 다른 장소에 있을 뿐인 예술. 그렇다. 나를 위해 도라도레스 거리는 모든 사물의 의미와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품고 있다. 단, 왜 수수께끼가 존재하고는가 하는, 결코 해답이 있을 수 없는 수수께끼는 제외하고.(p24)
8. 무능하고 예민한 나는 나쁘든 좋든, 고귀하든 천하든, 난폭하고 강렬한 충동은 다를 수 있지만 내 영혼의 본질로 파고들어 지속되는 감정과 계속 이어지는 정서에는 속수무책이다. 내 안의 모든 것은 항상 다른 무엇이 되려한다. 영혼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못 견디듯 스스로를 못 견디고, 불안은 점점 커지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모든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무엇에도 붙들려 있지 않다. 모든 일에 반응하지만 늘 꿈꾸는 상태다. (...)나는 두 사람이고, 그 둘은 마치 붙어있지 않은 샴쌍둥이처럼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p25)
9.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양말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상아 바늘로 뜨개코가 하나씩 이어질 때 마법에 걸린 모든 왕자들은 뜨개코의 뜰에서 산책한다. 사물의 뜨개질....휴지....무....(p27)
10.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p29)
11.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p32)
12.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언젠가 미래 끝자락에서 누군가 나에 대해 시 한편을 쓸 테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p35)
13. 책을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사자. 음악을 듣거나 거기에 누가 오는지 보려고 생각없이 음악회를 가자. 걷느라 지쳐 있을 때 긴 시간 산책하고, 시골이 따분하므로 시골에서 며칠을 지내자.(p36)
14. 동지애란 미묘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지배하고, 어떤 이들은 그 세상이다. 어느 미국인 백만장자, 카이사르 또는 나폴레옹이나 레닌, 작은 마을의 사회주의 지도자 사이에는 질적 차이는 없고 양적 차이만 있다. 그들 아래에는 우리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이들, 즉 경솔한 극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와 학교 선생 존 밀턴과 방랑자 단체 알리기에리, 어제 나에게 우편물을 가져다준 배달원이나 잡담을 들려준 이발사, 바로 오늘 포도주 반명을 남긴 나를 보고 쾌차를 빌어주는 동지애를 발휘한 식당 종업원이 있다.(p37)
15.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타고난 감수성의 혼란스러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의 총체가 바로 나라는 존재다. (p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