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내게 형이상학은 잠재된 광기가 연장된 형태다.(..)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인간 이하가 되는 길이다. 인간이라면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한 접시 위에 닫힌 상태로 놓인 상자, 받기는 해야하는데 열어볼 수 없는 상자와 같은 신앙을 건네 받는다. 또 백지 상태인 책장을 자르라고 준 접시 위의 칼과 같은 과학을 건네 받는다. 상자 속 먼지같은 회의도 건네 받는다. 안에 먼지만 들어있는 상자를 왜 내게 주는 걸까?
감정이 명백하고 단호할 때는 신들에 대해 말하면서 다양한 세상에 대한 의식 안에 감정을 끼워 넣는다. 감정이 심오할 때는 유일한 '신'에 대해 말하면서 유일한 의식안에 감정을 집어넣는다. 감정이 생각과 일치할 때는 '운명'에 대해 말하면서 감정은 벽 한쪽에 세워 놓는다.
88.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을때 나는 결국 누구인가? 감각의 거리에 버려진 채 '현실'의 길모퉁이에서 떨다가 '환상'의 빵을 먹고 '슬픔'의 계단에서 잠들어야하는 불쌍한 고아다. 내 아버지의 이름이 '신'임을 알지만 그 이름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89. 아무 소용없다고 여기는 행동을 고수하기, 아무 효과 없다고 여기는 규율지키기, 그리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철학적,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그것이 바로 우월한 인간이 지닌 유일하게 가치 있는 태도다.
90. 관조적인 삶이란게 실제로 가능하려면 실생활의 객관적인 사건들을,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의 산발적인 전제들로 여겨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꿈의 우연적인 성격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데, 그 관심 덕에 우리가 관조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 모르는 것ㅇ르 사랑하는 달팽이 같은 인간ㅇ나 자신이 얼마나 구역질나는지 모르는 거머리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살기 위해 무지해지는것! 잊기 위해 느끼는 것! 낡은 범선이 남기고 지나가는 희푸른 물살, 오래된 선실에 눈 밑의 코처럼 자리잡은 긴 방향키가 내뱉은 차가운 침 같은 물살 사이로 인간사 모든 일이 사라진다.
92. 몽상가 외에는 다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다. 삶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귀기울인 적도 없었다. 내가 있는 곳에 없는 것과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에 늘 속해 있었다. 내 것이 아니기만 하면 아무리 하찮은 것에도 나를 매혹시키는 시가 있었다. 아무것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93. 나에게는항상 감각보다 감각에 대한 인식이 더 강렬했다. 내가 의식하는 고통보다 내가 고통스러워한다는 인식자체가 언제나 더 괴로웠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나는 메아리가 되었고 심연이 되었다. 내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가면서 나는 여러 명으로 늘어났다.(...)나는 내 것이 아닌 인상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나는 포기를 일삼는 난봉꾼이고, 내가 나인 방식으로 타인이 된다.
94. 산다는 것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낀다면, 그건 어제를 기억하는 것이지 느끼는게 아니다. 어제 이미 살았고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오늘 살고있는 시체일 뿐이다.
하루가 다음날로 넘어갈 때 전날 있었던 일들을 칠판에서 모두 지우고 감정의 처녀성으 영원한 부활을 경험하며 새벽마다 새사람이 되는 것, 이것만이, 불완전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해볼 만한 일이고 될만한 일이다.
97. 정말 현명한 사람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사실들보다는 자기에게 가까운 현실이라는 갑옷을 걸친다. 그리고 사실들이 갑옷을 통과할 때 자신의 현실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에게 이르게 한다.
102. 인생이란 우리가 인생에 대해 품는 생각이다. 자신이 소유한 경작지가 전부라고 여기는 농부에게 그 땅은 제국이다. 자신이 소유한 제국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황제에게 그 제국은 한 조각의 땅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는 제국을 소유하고, 제왕은 땅 한 쪽을 갖는다. 우리가 정말로 가진 것은 우리의 감각뿐이다.
104. 지적인 사상이 일반적으로 허용되려면 어느 정도의 어리석음이 섞여들어가야 한다. 집단적인 사고는 집단적이기에 어리석다. 한 사상이 집단적인 사고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려면 통행세를 내듯 원래 있는 지성의 대부분을 밖에 두고 가야한다.(...)오늘날 월등하게 지성적인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행로는 포기하는 것이다.
105. 순응은 굴복이고 승리는 순응이다. 그래서 승리는 결국은 패배가 되고 모든 승리는 다 타락이다.(...)목표를 이룬적 없는 자들만이 승리한다. 언제나 낙담해 있는 자만이 강하다. 가장 훌륭하고 위엄있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107. 나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방랑하는 유목민이다. 나의 내면의 풍요로움은 처음 들판에 나가자마자 달아나버린 양떼처럼 흩어져버렸다.
111. 낭만적 사랑이란 영혼과 상상력이 만든 옷이며 우연히 나타난 사람에게 입혀놓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옷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옷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우리가 만든 이상적인 의상이 해어지고, 그 아래로 우리가 옷을 입힌 사람의 진짜 육신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낭만적 사랑이란 환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처음부터 환멸을 인정하고, 이상형을 끊임없이 변경해가며, 영혼의 공작소에서 새 옷을 계속 지어내 그 옷을 입는 사람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바꿔갈 때 뿐이다.
116. 글을 쓴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문학은 인생을 무시하는 가장 유쾌한 방식이다. (...)문학은 점점 빠지듯 인생에서 멀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