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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한국의 굴레>
70여 년 전,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국가에 버려진 국민들이었다. 과거를 책임져야 할 자들은 새로운 점령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친미, 반공, 경제재건 세력으로 기득권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아니 오히려 입지를 강화했다. 자주국가의 기본권인 국방과 외교권을 점령자 미국에게 헌납하고 그들의 보호하에서 오직 경제재건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자원이 없는 나라의 살 길은 노동집약 수출산업을 통한 외화확보다. 미국이 환율 특혜와 기술과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 다행히도 이들에게는 개미처럼 일하고 받은 저임금의 대부분을 은행에 저축하라는 국가총동원령에 순종하는 국민들이 있었다.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는 특혜 받은 소수의 수출기업에게 되몰아주어 생산시설을 확장하고 독점화시켰다. 노동쟁의를 막기 위해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공업화 정책에 대한 농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선심성 농촌 지원자금을 투입했다. 중요한 정책결정과 예산분배는 구체제의 교육제도에서 선발된 소수 엘리트 관료들의 몫이고 이들과 결탁한 정치 집단은 이념이 아닌 파벌로 이합집산하며 권력을 지키기에만 몰두했다. 국가정책에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학교교육을 철저히 통제했다.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파의 주장은 언론을 통해 관리하고 검찰과 공권력을 동원하여 탄압했다.
시간이 흘러,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과 강력한 재정정책을 통한 중앙집중식 국가개발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 외부적으로는 미국은 더 이상 이들을 보호대상이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추격자인 중국은 무섭게 치고 올라와 수출산업을 빼앗아 갔다. 위기감을 느낀 기업들이 종신고용을 철회하고 경쟁력을 상실한 농업은 더 이상 정부지원만으로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사회는 탄력을 잃으며 국민들은 무력해 졌다. 경제붕괴라는 대규모 참극은 요행히 막을 수 있었지만 서서히 가라앉는 국가경제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변화가 요구되고 대전환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외부의 힘에 복종하고 내부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직조된 사회질서에 안주하며 현상유지에만 집중했던 관료제 사회가 정작 그 모순이 한계에 봉착하게 되자 국가를 책임질 주체가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강력하고 새로운 정치력이 필요 했지만 책임을 질만한 정치세력이 없었다. 기성의 관료제와 결탁한 무기력한 기득권 집단들뿐이었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고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과거 지배층내 공생의 유착을 끊으려 했다. 정치와 경제제도를 개혁하려 하였고 미국과의 종속관계도 재정립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혼란이 벌어졌다. 이러한 ‘개혁’의 시도는 그동안 함께 기득권을 나누던 사람들에게는 ‘배신’이고 직접적 ‘위협’이 되었다. 사회 전영역을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들이 연합전선을 펼치며 구질서의 수호에 나섰다. 그중의 선봉장은 검찰과 언론이었다. 검찰은 스스로 국가질서의 가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긴다. 검찰은 모호한 법률의 조항을 근거로 어떤 정치인이라도 이런 저런 법률 위반으로 기소할 수 있다. 누구를 어떤 근거로 기소할 지 결정 하는데는 검찰의 자의적 선택적 판단이 절대적이다. 이들은 일단 특정인이 기존질서에 위협이라고 판단하면 각종 법률 위반사례를 적발해 주요언론에 알린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하고 그 장면은 잘 연출되어 시청자들에게 전달이 된다. 언론은 공공의 신뢰를 ‘배신’ 했다면서 분노의 어조로 정치인을 ‘위선자’로 몰면서 공격한다. 그들의 의도대로 여론이 형성되면 여기서 부터는 ‘법률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인 ‘도덕적 판단’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 ‘위선자’로 낙인찍힌 타겟이 물러설 때까지 검찰과 언론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격을 하여 결국 굴복시킨다. 이렇게 그들의 정치질서는 수호되는 것이다.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이렇게 매번 실패하고 좌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2021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아니다. ‘태가트 머피’가 <일본의 굴레>에서 묘사한 오늘날 일본사회의 모습이다.
긴 역사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지구상에서 어떤 나라도 문화적으로 한국과 일본만큼 서로 비슷한 나라는 없다. 그래서 일본은 항상 궁금하고 모르겠다. <일본의 굴레>라는 책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오랜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이 책의 저자 ‘태가트 머피’는 금융 투자자로서 일본에 와서 일본을 체험하고 일본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임하며 그들의 경제사회운영의 메커니즘과 일본인들의 내면을 모습 꼼꼼이 들여다 보며 40여년간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친일로 경도되거나 반대로 반일의 비판적 성향을 가질만 한데 경제 전문가의 시선으로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다. 저자는 일본에 대한 깊은 역사적 통찰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일본인들을 이해하지만 그들을 정색하고 옹호하지 않는다. 일본을 비판하지만 일본에 대한 존중과 연민을 버리지 않는다. 주종의 관계로서 미국을 이야기하지만 미국의 편에 서지 않는다. 이웃 국가인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고찰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언급할 뿐 일본을 변호하거나 주변국의 정서에 과몰입하지 않는다.
이 책이 대단한 것은 조각조각 나뉘어져있던 일본에 대한 궁금증의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는 순간, 그곳에서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오랜 시간 역사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며 근대에는 제국주의 침탈의 관계로, 현대사로 넘어와서는 국가성장의 행로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80년대 이후, 일본은 급속한 성장기 동안 누적된 사회모순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 우경화라는 구질서 회귀의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전사회적으로 일본이 겪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관료, 기업, 분배, 노동, 농촌, 환경, 여성, 저출산, 교육 등의 문제 등이 그렇다. 정치영역에서는 개혁을 저지하고 구질서를 지키기 위한 언론, 검찰,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공세가 드세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일본과 다른 것은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암흑기에도 좌절하지 않고 국민주권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자들의 겁박에 순종하는 주권자가 아니다. 국민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지켜왔다는 주인의식이 있다. 지금 당장은 일시적으로는 혼란스럽고 퇴보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구질서의 옹호자들에게 농락당하지 않고 성숙한 국민주권의 길로 뚜벅 뚜벅 나아가고 있다. ‘태가트 머피’가 <일본의 굴레>에서 안타깝게 바라본 일본의 모습,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들과는 다를 것이다. <일본의 굴레>가 <한국의 굴레>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 훌륭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