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들의 작품과 작가노트를 통해 작가님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바라는 바를 알 수 있다는 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매력인 것 같다. 작가님들이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서로 웃기를 바라는 따듯한 마음과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렵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노력해야 한다는 그 마음을 함께 추구하고 싶다.
> 초파리 돌보기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이 소설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이다. 원영이 내게 누누이 말해왔던 것처럼 원영도 잘 먹기를, 잘 자기를, 행복하기를.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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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쓰는 것보다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오래오래 행복하다'라고 소설을 끝맺은 작가님의 글이 뭉클하고 좋았다.
> 저녁놀
"따듯한 밥알과 잘 익은 채소가 아르헨티나산 새우나 베트남산 오징어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아,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이 밥을 위해, 이 식탁을 위해, 더 참고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다. 배부르고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눈점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눈점과 함께 먹는 게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다는 기쁨이 먹점에겐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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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점과 먹점처럼 우리 모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님의 마음이 참 따듯하다.
>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나는 손이 묶인 것처럼 문장을 잇는 게 조심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전적으로 내가 쓴 문장이, 무심코 쓴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번 숙고해 쓴 문장까지도,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거나 곤혹이 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더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어느 누구에게도 무해한 소설을 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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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삶이 서로에게 무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쓴 문장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애쓰는 작가님을 작가님의 소설을 응원하고 싶다.
> 공원에서
'개 같은 것들' 처럼 작가님이 빈칸을 채우면서 기분 좋은 뜻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작가님이 빈칸을 어떤 말로 실제 우리의 삶을 담아낼지 기대된다.
> 미애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 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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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천진한 얼굴에 담긴 희망, 그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다는 작가님의 말처럼 나도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 골든러시
누군가를 위해 소설을 썼다는 작가님. 비록 소설은 슬프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작가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다.
> 두개골의 안과 밖
"썼다가, 모조리 지워버린다. 내가 겪지 못한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없음. 차마 묘사할 수 없음. 함부로 재현할 수 없음. 아니, 재현될 수 없음.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음. 그렇기 때문에 쓰면 안 된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도 슬프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갈등도 없고 아무런 굴곡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차라리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절망으로 가득한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절망적인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면 절망적인 세상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이 더 나아져야 한다.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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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언어를 가졌을 뿐이라 다른 동물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써보려 해보지만 사실상 불가능해서 차마 쓸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소설을 쓴 작가님. 작가님이 알려주신 괴물같은 인간 중심적 사고의 무서움 앞에, 나 역시 겸허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된 얘기인지, 함부로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기 위해 애쓰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절망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차차 쓰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