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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음식이라면.. 자극적인 감칠맛이 없더라도 담백하고 정갈한 집밥 한 상 같다. 상에 차려진 음식들은 군더더기 없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은, 추가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딱 적당한 그런 맛이다. 담백하고 정갈하지만 진하고 깊은 맛이 담겨 있는 음식들. 수저를 뜨고 식사를 시작한 순간부터 식사를 마치는 순간까지 자극적인 맛 하나 없이도 한 입 한 입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을 하나하나 음미하듯 단어와 문장들을 하나하나 맛보는 미식가가 되는 기분이었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뿐만 아니라 그 순간순간 주변 자연, 풍경, 동물, 식물 등의 모습이 시각, 후각, 청각적으로 모두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만큼 정성스러운 묘사가 담겨있으면서도, 이를 표현함에 있어 덜어낼 단어 하나 없이 담백하고 적절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일본을 여행하면 이런 기분일 거라는 상상이 녹아들었고, 유튜브 여행, 먹방 영상에서 전달해주는 그 어떤 간접 체험보다 이 책 속 문장들은 강렬하게 그 상황의 느낌을 내게 전달해주었다. 작가가 내게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고 전달했다기 보다는, 부지불식간에 나도 모르게 마치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장소와 분위기에 내가 가 있었다.
Text라는 언어가 이렇게 사람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만끽하게 해 준 고마운 소설이다. 유튜브 영상과 같이 시각, 청각으로 간접경험하는 5분 남짓 짧은 영상이 전하는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모든 '감각'들이 소설 속 배경, 분위기, 상황들을 마치 실재인 것처럼 경험하고 있었다.
언어 그 자체의 맛과 풍미, 향기를 느끼게 해 주는 소설.
단어, 문장.. 텍스트 만으로도 소설 속 상황을 온전히 느끼고 상상하게 할 만큼 나의 시각, 후각, 청각 등 오감을 일깨워준 소설.
이 작가의 문장을 한 번 경험한 이상,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을 찾아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졌다.
여름의 끝자락이자 가을의 초입.
책장을 덮었지만, 물기 가득 머금은 짙은 녹색의 여름에 여전히 머물러있는 기분이다.
이 작가의 다음 책으로는 가을 향기를 물씬 머금은, 혹은 흰 눈으로 뒤덮인 서걱서걱한 겨울의 책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