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luv0625/222519627939
한강 작가와 첫 만남이다. 알아야 할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과 마음이 항상 같은 방향을 향하진 않는다. 간혹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작가와 책이 있다. 나에겐 한강 작가가 그랬다. 뭔가 거북하고 불편할 것 같다는 마음이 그의 책을 자꾸 밀어냈다.
하지만 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인지라 '부커상 수상 이후 5년, 한강 문학이 도달한 곳, 작별하지 않는다, 초판 출시'란 말에 갑자기 책을 예약하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이젠 좀 읽어봐도 되지 않을까?' 담담했는데, 막상 책을 받아들고 보니 뭔지 모를 감정이 훅 올라오고 왠지 모르게 떨리기까지 했다.
'부디 무탈하시길 빌며, 작별하지 않으며...'
'부디'...'무탈하시길'...무슨 인사말이 이리 사람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지, 왠지 나를 알고 해 주는 말 같은, 위로의 말 같기도, 걱정의 말 같기도, 안부의 말 같기도 한, 이 인사말이 뭐라고 벌써부터 마음이 이런 건지, 인사말을 한 번 또 한 번 읽어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이 무탈해야 할 텐데.
봄날의 제주는 온통 노란빛이더군요.
...그 찬연한 유채밭이 야생으로 피어 있는 골목과 기생 화산과 바닷가 언덕들을 헤매어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이상한 일은, 그 무의미한 일들만을 한 달 남짓 반복하고 나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적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또렷한 감각들이 내 눈과 코와 귀와 살갗을 뚫고 몸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_코멘터리 북, 「흰 꽃」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로, 33쪽
이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취향에 따라 책을 읽을 때 아무런 정보 없이 읽는 사람도 있지만, 난 조금 준비를 하고 읽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나 미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읽을 때는 특히 그렇다. (고전을 읽을 때 역사와 배경지식이 필요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봐야 작가의 말을 먼저 읽거나 추천사나 작품 소개에 대해 읽는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작별하지 않는다』의 코멘터리 북은 상당히 신선하고 좋은 선물이었다. 물론 작품을 읽기 전 편견이 생기거나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생각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지라), 가볍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고 나면 작품에 대해 더 애정이 생긴다고 할까?
『작별하지 않는다』 코멘터리 북은 작지만, 그야말로 알차게 한강 작가의 생각과 작품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이었다. 특히 한강 작가의 인터뷰와 그의 다른 작품들과 연계된 『작별하지 않는다』 장면에 대한 코멘터리도 인상적이었다. 작품들이 서로 끈을 잡고 있는 듯『작별하지 않는다』로 이어진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졌다.
| 삶 혹은 죽음에 대해_살아꿈틀대는 통증으로 가득한 두 사람의 이야기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_1부 새, 15쪽
『작별하지 않는다』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경하라는 소설가(한강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와 다큐멘터리 PD이자 사진작가인 친구 인선의 현실 이야기가, 2부는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에 간 경하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인선의 이야기로 4·3 제주를 알게 되고, 3부는 4·3 한가운데 있었던 인선 어머니의 비밀과 평생을 간직한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5·18 광주에 대한 소설을 출간하고 그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상한 꿈을 꾸는 경하가 살아서 사는 건지 죽지 못해 사는 건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이, 그녀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 인선이 손가락 절단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병원에서 그녀의 부탁으로 제주 집에 가게 된다.
인선이 말을 멈췄다. 간병인이 인선의 상처에 서슴없이 바늘을 찔러 넣은 동작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인선과 함께 숨을 멈춘 채 후회했다. 좀 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걸?_1부 새, 49쪽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_1부 새, 57쪽
문장은 어렵지 않으나 한마디 한마디 의미롭고, 평범한 듯 아름다운데, 서늘해지다가 따뜻해지다가 움찔하게 되는 생생함이 있다. 어느 순간 내가 경하와 인선을 마주 보고 있는 듯 문장 속 장면이 고스란히 눈앞에 그려지고 경하와 인선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인선의 고통을 바라보는 경하의 모습이 내 모습인 듯 순간 인상이 찌푸려지고 숨이 멎었다. 이것이 한강 작가의 글의 힘인가 보다. 경하의 뭔지 모를 마음의 고통, 인선의 생아픔이 어떤 여과지도 없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훅, 하고 뜨거운 게 명치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면 견딜 수 없었어. 집이 싫었어. 외딴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삼십 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도 싫고, 버스에 실려 도착하는 학교도 싫었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엘리제를 위하여>가 싫었어. 수업 시간이 싫고...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과 똑같이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지긋지긋하고... 무슨 불덩이 같은 게 쉬지 않고 명치께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어.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그러지 않으면 그 불덩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_1부 새, 77쪽
익숙함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미움이 되고, 단 몇 초도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다. (난, 왜 이 장면에 이리 감정이 훅 다가오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순간을 느낀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만 변덕스럽고 예민하고 까탈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뭔지 모를 안도가 느껴졌다. 어느 누군가도 이런 감정을 느끼기도 했구나.)
제주 4·3 이야기라고 해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1부는 의외의 펀치를 맞은 기분이다. 4·3의 비극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인선과 경하의 이야기가 전해 준 현실 몰입의 감정은 내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빗겨가 버렸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_1부 새, 42쪽
뭘 선택해도 통증과 함께 해야 할 인생, 1부는 분명 고통스럽긴 하지만 경하와 인선의 현재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삶의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되려 경하처럼 살리기 위해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통증을 참아낼 것인지, 차라리 죽여서 사는 내내 통증을 감내할 것인지, 그 선택이 어쩌면 우리의 지난(至難)한 삶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 더 쉬운 길, 조금 덜 고통스러운 삶 따위는 없다. 도대체 이런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통증과 동거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경하와 인선의 삶의 답답함이 내내 마음을 누른다.
새들이 건강해 보이는 건 믿을 수 없어. 경하야.
끝까지 고개를 들고 횃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이미 죽은거야._1부 새, 171쪽
이건 새에 대한 이야기일까?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까? 왜 이 이야기에서 난 구조의 간절한 메시지가 보이는 걸까? 사람이라고 다를까? 꼿꼿하게 잘 살고 있는 거 같지만 그 꼿꼿하게 세운 등줄기가 과연 삶을 지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쓰는 안간힘이었던 건지 어찌 알겠는가? 등줄기가 꺾여 나동그라졌다면 그건 이미 죽은 사람 아닐까? 그 마지막 힘을 다한 그 의연함이 때론 가장 강력한 구조요청일 수도 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드니 돌아봐 주세요.' 요즘 종종 뉴스에서 들리는 '일가족', 혹은 '000아파트'에서 하는 비극적인 소식들을 듣다 보니 괜스레 이런 해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주변 인터뷰를 해 보면, 아무도 몰랐다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미리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소설은 의외로 두 사람 경하와 인선의 죽지 못해 사는 삶, 살아도 통증 가득한 삶의 이야기로 시작해, 나도 모르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뭔지 모를 가정사에 의해, 뭔지 모를 압박에 의해, 뭔지 모르게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것들, 그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삶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_1부 새, 172쪽
완전하게 타협하진 않았지만 살려고 했던 경하에게 의외의 순간, 의외의 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비친다. 아이러니다. 살겠다고 생각한 순간 죽음의 시간이 온다니 말이다. 이건 삶에 대한 이야기일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픔에 대한 이야기일까? 극복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런 혼란 속에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폭설 내린 제주 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잊지 않은 고통_제주가 4·3을 기억하는 방식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왕 반듯이 바당을 보고 서서. 무슨 벌을 줄 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이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다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람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그네 한 사름씩 바당에다 데껴 넣어신디.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_1부 새, 223~224쪽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런데 왜 더 생생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걸까? 표준말로 명확히 정리된 말보다 더 두려움 더 공포스러운 더 잔임함이 느껴지는 건 방언 때문인 것 같다. 어렴풋이 느낌으로 알아듣는 그 말에 제주의 그날이 더 무겁게 와닿는다.
골목의 어떤 담 앞에 할머니가 멈춰 서서 '여기가 4·3 때 사람들이 총 맞아 죽었던 곳'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고 특히 햇빛이 눈부십니다. 그 찬란한 오전에 그 말을 들은 순간의 아득함, 수십 년 당시 섬 인구의 십 분의 일인 삼만 명이 살해되었던 사건이 충격적인 실감으로 다가왔던 것을 기억합니다._코멘터리 북, 13쪽
한강 작가가 받았던 '그 찬란한 오전'의 충격이 어떤 느낌인지 이 이야기를 읽고서야 이해된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창호지를 뚫어 들여다봤던 그 끔찍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방언으로, 모두 알아들을 순 없지만, 그저 느낌으로 전해지는 충격도 이리 큰데 직접 그 땅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민 다 해줘서.
우리 서방이 살아 이서시민 질색해실 일인디 일찍 죽어부러난 나를 못 말렸주. 저승에서 쫓아왕 말릴 수도 엇고 어쩔 거라. 귀신이 이시난 꿈에라도 와그네 말릴 건디 아직 그런 적도 어서._2부 밤, 227쪽
경하가 폭설로 조난을 당하고 어떻게 외딴 인선의 집을 찾았는지,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어떻게 갑자기 제주에 있는 경하에게 나타나 4.3의 비극과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 어느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어진다. 다만 경하가 환상인 건지 인선이 환상인 건지 아니면 둘 모두 환상인 건지는 모르지만, 읽다 보면 그건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_2부 밤, 220쪽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절멸?'그 말이 주는 충격, 이것이 현실에서 쓰일 수 있는 말일까? 그것도 사람을 향해? 1948년 그 찬란한 4월에 제주에서 일어났던 그 '절멸'이 제주 사람들에겐 그리고 그 사건을 마주한 우리들에겐 차라리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날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은, 현실에선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절멸'이라는 그 끔찍한 말이 나와서도 안 되는,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묻혀 있다는 것이, 오로지 그날을 목격한, 희생된 가족을 마음에 묻은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이 도저히 현실적이지가 않다.
역사를 잘 못 배웠다. 사실 제주도는 무수히 갔던 것 같은데, 한 번도 제주에서 4·3을 떠올린 적이 없다. 대부분은 출장이라 일만 보고 비행기 시간 맞추느라 허둥대고 나왔던 기억이 많고, 여행으로도 여러 번 갔었지만, 그것도 봄에 갔던 기억이 가장 많은데, 그 바다와 하늘에 취해 사진 찍기 바빴던 기억이 전부다.
한국사를 배울 때도 6.25 이후 역사는 거의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요즘은 근현대사가 중요하다는데, 라떼는 그랬다. 주구장창 왕조사만 외웠더랬다.) 교과에서나 선생님이나 나나 애들이나 별로 심각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다. 4·19도 5·18도 1987도 다 성인이 되어 그나마 관심을 갖게 되었고, 4·3은 얼핏 개요 정도 알고 있던 정도다. 나와 직접 관계없는 역사라 생각해 그냥 넘겼다. 고백하자면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현대사, 억울한 사람들이 넘치는 그 진실을 아는 것도 분통 터지는데, 이미 70년 전 (사실은 고작 70년 밖에 안 된) 역사에는 무관심했었다.
제주는 그저 아름다움 섬, 언젠가 한 두 달 정도 살아보고 싶은 정도의 쉬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 정도로밖에 내 생각에 없다는 게 책을 읽는 내내 죄책감처럼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실은 부끄러웠다. 모르고 외면하다가 책 한 권에 이런 분노를 이제야 느끼는 게 부끄러웠다.
나는 눈을 감는다.
먼 서향 창의 블라인드 틈으로 점점 깊이 들어와 마침내 내 얼굴까지 다다랐던 열람실 복도의 햇빛이 생생해졌기 때문이다. 방금 읽은 숫자들 아래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단박에 휘발시키려는 듯 찬란한 빛이었다. _2부 밤, 266쪽
이미 몇 번을 말라붙어 흔적조차 없을지도 모를 그 희생의 피들에 대한 책임도 없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남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차라리 생사 여부만 확인할 수 있어도, 그 피 묻은 육신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어도 그들의 고통은 인선의 엄마처럼 평생 가슴속에 남진 않았겠지만, 그날의 제주보다 더 끔찍하고 참담한 건 그 후 국가의 외면이다. 자신의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 지키지도 못했으나 죽음조차 알고 싶지 않았던 국가. (내 가족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런데 생사여부도 알 수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이 미치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런 억울함과 분노를 어떻게 평생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엄마는 실패했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인선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뼈를 찾지 못했어. 단 한 조각도. _2부 밤, 286쪽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 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 다리미가 올라 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_2부 밤, 230쪽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린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서 차라리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 생각되면서도, 저 정확히 알아듣지도 못한 말에 뭐에 얹힌 듯 가슴이 먹먹했다.
|아름다워서 더 비극적인_한강의 글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더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으로_1부 새, 78쪽
지독한 미움은 지독한 사랑이다. 엄마에 대한 이 미움이 엄마의 비밀을 알고 난 후 더한 연민과 사랑이 되기까지 한강 작가는 길고 지루하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너무 모질고 날이 제대로 선 그 아픈 말속에 애증이 느껴진다.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앉아 있었는데, 내 빰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_1부 새, 81쪽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빰에 눈이 쌓이고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_1부 새, 84쪽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_1부 새, 95쪽
감당할 수 없는 과거는 더 지독한 사랑으로 남기도 한다. 학살의 현장에서 애타게 오빠와 여동생을 찾던 자매가 느꼈을 그 아득함, 그 간절함을 한강 작가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그린다. 그 차가운 한 문장 한 문장이 더없이 날카롭다가 어느 순간 따뜻하기도 한데 너무 아프다.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
_2부 밤, 177쪽
『작별하지 않는다』는 시 같기도 하다. 처음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었을 때 그 수많은 글자들이 한 편의 시처럼 읽히는 데 놀랐었는데,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서사시이면서 서정시 같다.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글들이 간결하고 매끄럽고 아름답게 읽힌다. 단연의 시처럼 정제된 아름다운 글들이 그 풍경을, 그 감정을,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강 작가가 시집을 낸 것은 당연한 일인 것도 같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받아들고는 소설가가 욕심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욕심(?)이 아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어떤 내용인지 한 마디로 말하라면, 아니 한 편의 시로 쓴다면 이러지 않을까? 읽는 내내 4월의 찬란한 제주를 갑자기 모두 덮어버릴 듯 내리는 눈의 한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아름다운데 너무 춥고 떨렸다.
지금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한기 때문에 겨울에 읽었다면 느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마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을 때 느꼈던 한기가 너무 기억에 남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백석의 쓸쓸하고 차가운 운명이 읽는 내내 더 시리게 와닿았던 건 김연수 작가의 글과 그 겨울의 추위가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에도 온도가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난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추위를 느낀다. 『작별하지 않는다』 는 [일곱 해의 마지막]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한기와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눈(雪)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때문에 비극이 더 도두라져 보인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떨어진 피 한 방울이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https://m.blog.naver.com/luv0625/222519627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