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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내용으로 이유도 모른 채 학살과 폭력으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5월 광주 이야기를 집필한 경하는 자신이 쓴 책으로 인해 악몽을 꾸며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꿈은 한강 작가 자신의 꿈이기도 한데 꿈 얘기로 시작하는 첫 장을 읽으며 기운이 빠진다. 끝까지 읽으려면 내 안의 모든 힘을 짜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책 속에 숨겨진 내용의 무게에 짓눌리는 기분이다.
자신이 쓴 책의 내용으로 힘들어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글을 쓰고 기억을 남기며 반복해서 떠올리며 내가 쓴 글에 짓눌리며 살아야 하는 작가의 삶을 생각해 본다.
갑작스러운 인선의 부탁으로 준비도 없이 떠난 제주도에서 경하는 눈보라를 헤치며 인선의 집으로 힘겹게 향하는데 그녀가 걸어가는 그 길이 무척이나 위태롭다.
무슨 생각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날씨와 어둡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지 그 마음은 알 길이 없다. 마치 저승길을 가듯 힘겹게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경하가 지독히도 쓸쓸하고 버거워 보인다.
분명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경하 앞에 있다.
나는 이제 그들의 꿈속에 있는 것 같다.
조금 으스스하고 멍하게 인선의 이야기를 읽는다.
인선은 죽어서 나타난 것일까? 실제인지 영혼인지 모를 인선은 과거 부모님이 겪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말하며 어머니가 모아놓은 관련 자료를 경하에게 보여준다.
어머니가 모아놓은 기록들.
인선은 사라져도 그 기록들은 남아있겠지.
죽은 이를 살릴 수는 없지만 죽음에 관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류장에서 만난 늙은 노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인선의 어머니는 아니었을까?
말없이 경하를 지켜봐 준 게 아닐까?
나 혼자서 진실이길 바라는 착각을 해본다.
한강 작가의 책은 늘 어렵고 무겁고 착잡하다.
그래서 읽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하는 작가이다.
내가 모르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깨닫고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무겁고 어두운 내 기분을 더 바닥끝까지 끌고 가는 글을 따라간다. 5월 광주, 4•3제주. 너무 무거운 사건을 그보다 더 무겁게 전달받는다. 결코 그 무게를 잊을 수 없게.
그렇게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