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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병원이라는 고립된 시설에서 두 사람 - 정신과 의사와 환자 - 의 반복되는 대화라는 소재가 독특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잡을 수 없이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현병' 진단을 받은 천재 수학자(얼리샤 웨스턴)와의 대화가 쉬울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얼리샤의 지적인 플레이에 의사가 휘둘리는 지점도 있었던 것 같구요. 특히 수학과 물리학의 역사와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영화 <오펜하이머>와 핵개발 관련 저서, 그리고 <파인먼 평전>을 나름 읽어 두어서 중간중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뚜렷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았는데요,
무엇보다 소설의 중심 소재가 맨해튼 프로젝트이고, 얼리샤의 아버지가 오펜하이머 밑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와 이후의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전쟁을 통해 '과학과 과학자'의 위상을 부각시켰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과학의 실용성과 힘을 세계가 확인했던 사건이었던 셈이구요.
하지만 얼리샤 아버지가 보여준 원자 폭탄 사용에 대한 냉소적 혹은 거리두기 태도는 많은 미국인들 혹은 서양인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나치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국가 사업이, 나치가 망하고 나자 이를 일본에 투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나오지만, 이 프로젝트 과정 중 그리고 원자 폭탄 투하 이후 그 결과와 참상에 대해 충격을 받고 반성하는 과학자도 물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수소폭탄 개발을 이어나갑니다. 곧바로 냉전 시대가 시작했기 때문이죠.
어떤 점에서 보면 이 정신 분열적인 서양 문명의 행보는 얼리샤가 진단 받은 '조현병'과 오버랩됩니다.
수학에 대해 완전 무결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얼리샤가 숭배했던 괴델이 발표한 이론 '불완전성 정리'와 같은 이론들이
수학 자체가 지니는 틈새를 보여주며 그 믿음이 흔들렸던 것일까요.
또 하나 얼리샤의 조현병적 증세는 또다른 부조리함 - 근친 상간 금기 - 에 대한 부작용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지도 생각해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20세기 서구 문명의 분열적 행보와 얼리샤의 분열적 증세(조현병)에 대한 은유로 병치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코맥 매카시는 수학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첨단 지식이 사람을 이롭게 하기 보다,
사람을 대량 살상하는 기술로 이용되고, 나아가 인류 공멸의 위험에 처하게 된 부조리함을
얼리샤의 개인적인 문제와 병치하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신의학 분야에 대한 논의입니다.
최근 정신의학사 관련 도서를 읽어보니, 정신의학에서는 현재까지도 '조현병'과 같은 병의 범주에 대해 매끈하고 확실한 정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진단 역시 (여전히) 아무도 정확하게 내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코맥 매카시는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스탠퍼드의 로젠한이라는 이름의 교수가 미친 척 하고 정신병원에 가서 '조현병' 진단을 받고 몇 주간 생활하다 나온 실제 사례를 본문에서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75면) '여기에는 정신과 의사 여남은 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로젠한이라는 교수 한 명이 먼저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있다 나왔고, 이후 지원자를 몇 명 받아 똑같이 '조현병' 진단을 받고 수용된 사례가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정신병자'라고 정해놓은 이 기준이 너무나 자의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수학에서의 불완전성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허술한 지점이 있었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았던 역사가 있었던 것이죠.
인간은 이처럼 자의적으로 정상-비정상을 나누고 언어로 잣대를 만들어 이 틀안에 끼워넣는 만행을 지속해왔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에는 다층적인 부조리함이 층층이 쌓여 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대변되는 현대 과학 문명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부조리함,
정신의학으로 두드러지는 현대 의학의 부조리함,
얼리샤의 근친 상간 욕구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조현병 증세와 자살 욕구가 지니는 부조리함.....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그의 유작으로 처음 접했기에 그의 사회에 대한 태도나 입장을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는데요,
물리학과 공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작가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면서,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관심이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