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쪽
겨울의 목가, 윌리엄 트레버, 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독파
179쪽
메리 벨라는 처음 잠에서 깼을 대는 기억을 못 했다가 잠시 후 생각이 났다. 그가 오지 않았다. 역에 나간 우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기차가 연착한다고 했다. 그때쯤이 거의 열시였고 그녀는 소파에 앉아 기다리다가 잠이 든 게 분명했다. 침실로 올라간 기억이 없었다.
180쪽
그녀는 그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는 그 여름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기억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181쪽
교실에서 그녀는 따분한 지리학, 기하학의 재미없는 직선들과 사다리꼴의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싫어했다. 역사는 그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시는 쉽게 배웠으며, 철자법과 어휘에는 재능이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은 그 여름에 그녀는 앤서니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그녀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던 그는 9월이 왔을 땐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흔들렸다.
182쪽
그는 자신이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 것-이를테면 메리 벨라가 말해온 슬픔, 이윽고 마지막 날이 와서 그들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때 그녀의 눈동자에 어렸던 절박감-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앤서니는 잊었다. 그러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잊었다.
188쪽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금세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걸 물려받는 것이 하나뿐인 자식의 운명이라고 메리 벨라는 말했다. 그건 불평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불만이 들어 있지 않았고, 다른 자식이 없기에 자신이 모든 걸 소유해야만 하는 게 코미디라도 되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예전에 그랬듯이 미소를 자주 지었다. 웃음도.
190쪽
앤서니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다른 일, 그동안 불가능했으나 이제 불가능하지 않게 된 일의 일부였기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으나, 달라질 건 없었다. 그 모든 걸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존재했다. 그녀와 함께 다시 황무지를 걸은 이후로, 그다음에 주방에서 그녀가 차를 끓인 이후로, 그들의 교실에서 그가 그녀를 원한 이후로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많은 순간들을 물들인 것이다.
191쪽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그저 의혹일 뿐이라고 믿으려 애썼지만, 그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불안감은 물러나지 않았고, 두려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거는 남아 있지." 앤서니가 말했고, 메리 벨라는 그가 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돌이 주는 영감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의 생각은 말로 표현되기 전에 서로에게 전해지곤 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그런 환상을 나눴다.
192쪽
목가,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써준 그 단어를 그녀는 늘 사랑했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했다.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도 써주었다. 그가 다시 온 후로 그들은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될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런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 집, 그 황무지는 그들이 함께 속한 곳이었으니까.
가을이 왔고, 가을 햇살은 실망스러운 여름을 견딘 후의 보상과도 같았다. 교외 지역의 나뭇잎들은 아직 시들지는 않고 생기와 초록빛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제 곧 오후에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 거라고, 니콜라가 그날 그 시간에 앞서 말했었다.
193쪽
그녀는 방금 꺾어 온 개밀 잎사귀를 손가락에 감았다. 자신이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고 앤서니는 생각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바람에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개밀 잎사귀를 부주의하게 만지다가 손가락을 베인 그녀는 잎사귀를 던져버렸다. 그녀가 베인 손가락을 입술에 댔고 그가 뭘 좀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195쪽
메리 벨라가 고독했던 시기에 동무가 되어주었던 개는 또 다른 존재를 의심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었고, 날들이 주로, 달로 물 흐르듯 바뀌어가는 동안 앤서니나 메리 벨라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둘 다 그들이 함께 누리고 있는 그 만족감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198쪽
바람이 윙윙대며 흐느꼈고, 돌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황무지에서는 대화가 사라졌다가, 다시 시작되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메리 벨라는 추위를 막기 위해 투박한 농장 옷을 입고 있었는데, 거친 트위드와 허름한 코듀로이가 앤서니에겐 여전히 어린애 얼굴처럼 보일 때가 많은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 돋보이게 했다. 메리 벨라를-그녀의 정신, 본성, 웃음, 그리고 슬픔까지-두 번 알게 된 그는 다시금 그녀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199쪽
"선생님이 상상하는 법을 가르쳐 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메리 벨라가 속삭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어조는 그녀의 의견에 담긴 아이러니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바람에 흩어져도 그녀는 그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더 강하게 요구된 건 먼 길을 걸어 돌아올 때의 조용한 메아리, 아직은 제 존재를 공표하지 않을 암시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농장 마당은 고요했고, 일꾼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빈집은 따뜻했고, 눈먼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쪽
며칠 동안 내린 눈은 바람에 날려 눈더미들을 이루고, 헛간들 지붕과 창턱과 얼어붙은 유리창을 덮었으며, 빗물통과 디딤대의 모양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두었다.
201쪽
밤이 되면 연민이 그녀를 침묵하게 만드는 사랑에 도전장을 내밀며 예전처럼 예상된 방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제넘게 나섰다. 그래도 연민을 버릴 수가 없었다.
202쪽
그녀는 이 순간이 올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으며 지내왔다.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언젠가는 슬그머니 사라질 거라고, 날이 갈수록, 밤이 갈수록 고통을 견디기 쉬워질 거라고.
"이제 다 끝났어." 앤서니가 말했다. "끔찍한 시간은 지나갔어."
끝나지 않았다. 기억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잖게 사라지지 않고 악마들을 풀어놓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그녀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203쪽
밤은 느렸다. 밤의 느림은 그들의 희망이었고, 창턱 위에 놓인 시곗바늘의 굼뜬 움직임은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시간은 그들의 수호신이라고, 앤서니가 말했다. 시간은 공허하게 흘러가면서, 그들의 사랑이 고귀한 로맨스로 완성될 때까지 그 사랑을 지켜줬으니까.
204쪽
봄이 올 듯하다가 오지 않고 있었고, 어느 아침에 앤서니가 모습을 감췄다. 아침 일찍 잠이 깬 메리 벨라는 차 소리를 들었다.
206쪽
들판의 울타리 개조가 마무리되어 새 문이 달리고 전에는 없었던 층계형 출입구도 생겼다는 말을, 그녀는 듣는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영원히. 관계를 회복해 보려는 저속한 시도는 없을 것이며, 거짓 속에서 없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