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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삶의 근본 감정이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성취를 이룬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에게 삶의 근본 감정은 개인적 이익과는 동떨어진, 이른바 일반적이고 초개인적인 이익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개인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것에 대한 진솔한 숭배였다. 그건 이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라는 사람이 조화로운 공존과 일반적 원칙에 따르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혈통이 좋은 개가 주인의 발차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식탁 밑의 자리를 찾아드는 것은 개의 타고난 비천함 탓이 아니라 충직함과 지조 덕분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
만일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그건 원래 이러해서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하면 가능성인간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냐, 어쩌면 다를 수도 있었어. 그렇다면 가능성감각은 현실과 똑같이 존재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내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는 능력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도 이런 창조적 성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들이 상당히 주목받을 만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결과들은 드물지 않게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을 오류로, 사람들이 금지하는 것을 허락된 것으로, 혹은 둘 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
돈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선택한 직업이라면 해가 거듭될수록 공허함이 밀려드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런 순간이 꽤 오래 지속된 끝에 울리히는 사람들이 고향에 신비스러운 능력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정신을 뿌리내려 토양에 맞게 번성시키는 능력이었다. 그는 곧 다시 떠날 것을 예감하면서도 언제까지고 벤치에 앉아 있는 방랑자의 심정으로 고향에 정착했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
흔히 그렇듯 돈을 받고 인격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몸만 파는 것을 매춘이라고 한다면 레오나도 가끔 매춘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열여섯 살부터 구 년 동안 싸구려 노래 홀을 전전하며 받은 쥐꼬리만한 보수에다 의상과 속옷 값을 생각하면, 또 술집 주인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떼는 비용과 그들의 탐욕과 전횡, 단골손님들이 먹고 마신 음식 값에서 받는 변변찮은 수수료와 인근 호텔의 방값, 그리고 그 때문에 날마다 싸움을 벌이고 한 푼 두 푼 따질 수밖에 없는 처지를 떠올리면,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일탈로 비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논리적이고 사무적이고 신분에 맞는 직업이 될 것이다. 이처럼 매춘은 위에서 보느냐 밑에서 보느냐에 따라 간극이 큰 사안이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
오늘날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타인에게 불편한 대립각을 세운다. 인간이 자기 집단 바깥의 사람을 뿌리깊이 불신하는 것은 문화의 근본 특징이다. 그래서 게르만족만 유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축구선수도 피아노 연주자를 그리 생각한다. 결국 사물은 오직 경계 짓기를 통해, 아울러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어느 정도 적대적인 행동을 통해 존속한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
인류는 경전을 만들면서 동시에 무기를 만들고, 결핵을 만들고는 다시 결핵 치료제를 만든다. 또한 왕과 귀족과 함께 민주주의를 하고, 교회를 지으면서 다시 교회에 반대하는 대학을 짓고, 수도원을 병영으로 만들면서 그 병영에 다시 군목軍牧을 배치한다. 그뿐이 아니다. 다른 시민의 몸을 죽도록 패라고 무뢰배들의 손에 납을 채운 고무봉을 쥐여주고, 그런 다음 학대당한 그 고독한 몸을 위해 지극한 존경과 배려로 가득 채운 듯한 오리털 침대를 마련해준다. 지금 울리히를 품고 있는 침대처럼 말이다. 이건 잘 알려진 대로 삶의 모순, 비일관성, 불완전성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