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luv0625/222531871305
『바람의 그림자』를 알게 된 건 강의준비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1200만 부가 팔린 그중 스페인에서만 7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이라는 판매 부수에 놀라서였다. 현재 스페인 인구가 4670만 정도인데 700만 부가 팔렸다면 6~7명 중 한 명이 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스페인의 독서력이 대단한 건지, 아님 이 책이 대단한 건지 암튼 이 기사를 보고 놀라서 '독서의 중요성' 강의를 할 때 많이 인용했었다.
그리고, 2020년 저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죽고 난 두 달 후 우리나라에서 『바람의 그림자』가 출간되었다. 출판기념으로 준 굿즈 포스터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 많은 사람들이 샀다는 걸까? 그리고, 이제야 꺼내어 읽은 건 순전히 문학동네 '독파'때문이다. 독파의 첫 번째 챌린지 도서 8권 중 한 권으로 나왔을 때 너무나 반갑게 선택했었다. 이미 벽돌책격파단에,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읽기로 한 상태라, '독파'활동은 안 했지만, 이참에 읽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암튼, '독파' 때문에 『작별하지 않는다』와 『바람의 그림자』를 읽었으니, 활동과는 상관없이 책꽂이에 꽂힌 책 다시 꺼내는 데는 충분히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다.)
"많이 팔린 책이 훌륭한 책은 아니다!"
-1200만 부의 함정
『바람의 그림자』는 2001년 발표된 책이다. 흔히 '고딕 로맨스'라고 하는 18~19세기에 유행했던 상업주의 문학의 한 장르다. (고딕소설_ 중세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 소설, 네이버 [문학비평용어사전]) 우리나라에서는 뮤지컬로 유명한 다프네 뒤 모리에의 [레베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굳이 상업주의를 강조한 것은 어찌 되었건 어둡고 으스스한 분위기에 미스터리, 음모, 배신, 여기에 신분을 초월한 사랑 뭐 이런 게 섞여있으니 재미없을 리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읽는 장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딕소설 대부분이 조금 애매한 포지션에 있다. 하지만, 그 스토리의 자극성과 재미, 얽히고설킨 복잡다단한 이야기 구조 때문에 영화나 뮤지컬, 드라마에서는 꽤 좋은 소스로 쓰이기도 한다.
너무 뻔한 클리셰를 담고 있음에도 그 재미 때문에 사람들이 찾지만, 이 작품들이 과연 고전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몇 십 년 읽히다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통속소설이 될지의 구분이 참으로 애매하다. [폭풍의 언덕]은 고전이라 하는데, 그럼 1200만 부나 팔렸다는 『바람의 그림자』도 명작이나 고전이 될 만한가?
결론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니다! 『바람의 그림자』는 명작과 통속 그 어딘가를 방황하다 통속 쪽에 머무른 아쉬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00만 부, 700만 부에 너무 기대를 했던가? 베스트셀러가 다 좋은 책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거늘, 그다지 실망할 필요는 없지만, 왠지 조금 씁쓸했다.
만약, 『바람의 그림자』가 [폭풍의 언덕]처럼 19세기에 나왔다면, 아니면 좀 더 오래전 18세기에 나왔다면 어쩌면 '고전'의 반열에 들 수도 있는 여지가 있다. 그만큼 많은 인물들, 그 인물들의 치밀한 관계, 긴장함, 재미는 인정하지만, 이미 그러한 클리셰가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사건과 우여곡절에도 주인공들이 전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서 본 듯, 개성 없는 인물들 때문이다. 재미 그이상의 감동과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 인물지옥 , 얽히고설킨 인연과 사건_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은 '사랑' 아니 '치정 복수극'이더라!
785쪽의 분량과 주인공 다니엘과 다니엘이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발견한 책의 저자인 훌리안 카락스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있는 우리가 문학 시간에 배웠던 액자소설 형식이다. 다니엘과 관련된 인물, 훌리안 카락스와 관련된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데다가 현재의 인물이 과거와 과거의 인물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등장인물들이 많은 데다, 조금은 낯선 스페인 이름들이라 읽으면서 인물관계도를 그리지 않으면 이름만 듣고 바로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복잡한 이야기다. (인물관계도만 그려놔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인물 사이의 관계와 사건들이 촘촘하게 잘 연결되어 있다. 이건 인정~)
"다니엘, '잊힌 책들의 묘지'에 온 걸 환영한다."
..."이곳은 신비한 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책을 읽으며 꿈을 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장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_잊힌 책들의 묘지, 16쪽
..."도서관 하나가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아는 우리 파수꾼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손에 닿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최고의 친구였어. 다니엘, 이 비밀을 지킬 수 있겠니?"_잊힌 책들의 묘지, 16쪽
그리고 적어도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시작해 '대단한 인물들'까지의 이야기는 적당한 긴장감과 쫀득한 미스터리로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했따. 다니엘이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훌리안 카락스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 책과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일생을 쫓으면서, 동시에 불같은 첫사랑의 감정과 상실을 겪고 새로운 사랑을 찾기까지 과정은 다니엘이 그랬듯이 괜찮은 책을 발견한 것 같은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카락스를 망각 속에 묻으려 했다고 해도, 그는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_잿빛 나날 1945~1949, 46쪽
난 독서의 즐거움, 영혼을 향해 열린 공간들을 탐험하는 즐거움, 허구의 이야기와 언어가 지닌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상상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즐거움을 몰랐었어. 내겐 이 모든 것이 그 소설과 함께 태어났지. 다니엘, 여자애와 키스해 본 적 있니?"
뇌가 멈춘 듯했고 입안의 침이 톱밥처럼 느껴졌다.
"그래, 넌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느낌이야. 잊히지 않는 최초의 그 불꽃 말이야. 이건 그림자들의 세계야, 다니엘. 그런 마법은 진귀한 재산이고, 그 책은 독서란 것이 나를 아주아주 치열하게 살게 해줄 수 있다는걸, 내가 잃어버린 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줬어. 단지 그런 이유로 아무에게도 중요치 않았던 그 책이 내 삶을 바꿔놓았지."_잿빛 나날 1945~1949, 49쪽
하지만, 거기까지! 북토크로 이 책의 가장 결정적인 반전을 알았음에도 막상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지게 하는 '막장 of 막장'의 스토리와 결국은 이런 복잡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일차원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데다, 주인공들은 오로지 '사랑밖엔 난 몰라'에 극단적으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오해하며 복수하는 것이 진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왜 훌리안 카락스에 빠져 사랑을 하는지 (글을 쓰는 매력?) 그의 괜스레 비참한 것처럼 보이는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그다지 와닿지 않고, 다니엘이 훌리안 카락스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며 자신의 사랑을 찾고 성장해가는 성장소설이라 하기엔 다니엘이 과연 무슨 성장을 했는지 무슨 매력을 가진 인물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애써 훌리안 카락스와 다니엘을 평행이론 선상에 놓고, 무엇인가 연관이 되는 듯 위고의 만년필, 비슷한 사랑의 과정을 통해 엮어 보려 하지만, 그럼에도 다니엘은 그냥 훌리안 카락스의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한 화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한테 쓰라는 게 아냐. 책을 쓰라고. 편지 말고. 날 위해 책을 써. 페넬로페를 위해서도."_그림자의 도시 1952~1954, 461쪽
미켈 몰리네르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어.
...화려한 생활은 고사하고 수도자처럼 살면서 미켈은 피 묻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돈을 박물관이나 성당, 학교, 도서관, 병원 등을 복원하고 또 어린 시절 친구인 훌리안 카락스의 작품들을 그의 고향에서 출판하는 데 낭비하고 있었던 거야."
"돈이야 넘치도록 많아요. 하지만 훌리안 같은 친구는 부족하죠." 이게 그의 유일한 설명이었어._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1933~1954년, 592쪽
유일하게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걱정하고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은 훌리오의 친구인 미켈 몰리네르다. 주인공인 훌리안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 인물이자, 이 책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인물 중 유일하게 마음에 와닿는 인물이며, 어쩌면 주인공인 훌리오와 페넬로페보다 훨씬 더 연민이 생기고 안타깝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무기 판매상인 아버지의 재력으로 화려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었으나,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친구들을 알아보았고, 거만함은 없고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진 인물이면서, 사랑에는 순정파로 자신이 사랑하는 누리아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어도 끝까지 보살피며 함께 하는 인물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미켈의 비극에 더 마음에 가고 그의 비중을 좀 더 크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스 베이더의 'I'm your father'의 충격을 능가하는 대사가 여기서!_이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앤 알고 있어." 그녀가 중얼거렸지. "불쌍한 것. 0000는 알고 있어 ······"
"알다니요, 뭘요?" 미켈이 물었어.
"내 잘못이야." 소피가 말했어. "내 잘못이야."
미켈은 영문을 모른 채 그녀의 손을 잡았지. 소피는 그를 마주 보지 못했대.
"0000와 000은 남매지간이란다." 그녀가 중얼거렸다._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1933~1954년, 618쪽
아... 이건 아니다. 이런 대사는 이제 일일드라마에서도 불문율이지 않은가? 이 작품이 2001년도에 출간되었으니, 어쩌면 막장 드라마의 기본 모티브인 출생의 비밀과 사랑과 복수, 알고 보니 다 아는 사람이라는 식의 인물들 간 복잡하게 얽힌 갈등구조의 원조 격인 지도 모르겠다.
아...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적어도 1200만 부가 팔린 소설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굳이 이렇게 대놓고, 막장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친절하고 세심하게 설명까지 해 주면서 말이다. 출생의 비밀이 있더라도 좀 더 우아하게 문학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을까?
이것이 정녕 2001년도에 나온 소설이란 말인가? 『바람의 그림자』가 결국 통속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복남매의 사랑?' '비극을 만든 부모들의 무개념?' '이루어 질 수 없는 누구와 누가 사랑하고, 그걸 알고 그의 가족들이 죽이려 달려들고' '짝사랑한 여자를 향한 집착으로 치정 살인을 하려는 친구가 있고' 뭐, 그래! 스토리의 막장성이야 그렇다 치자. 고전에도 불륜, 복수, 살인 등 막장적 요소를 가진 작품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결정적으로 막장이 된 이유는 처음 '잊힌 책들의 묘지'~'대단한 인물'에서 보여주었던 미스터리, 긴장감, 치밀한 서사를 포기하고, 이야기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단 거다.
훌리안과 미켈의 친구 페르난도 신부를 만나니 그가 '산 가브리엘 학교'에서의 히스토리와 원한의 비밀들을 술술 풀어 해결해 주고, 페넬로페의 유모를 정신병원에서 찾아내니 또 그녀가 속시원히 페넬로페와 그 집안의 비밀을 너무 쉽게 이야기해 주고, 결정적으로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지금까지의 이야기 리뷰와 함께 훌리오와 미켈의 연인이었던 누리아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페넬로페가의 비극에서 푸메로와의 관계, 훌리오, 미켈의 모든 이야기까지 무려 138쪽에 걸쳐 또 한편의 단편 소설처럼 너무도 친절하고 상세히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다혜 작가님은 이런 서술을 작가가 선택한 편리성이라고 했는데, 흡사 50부작의 미니시리즈 중 40부작 정도 되었을 즈음, 제작 시간도 벌고 그동안 이야기가 너무 많아 시청자들이 혹시라도 잊었을까 염려한 방송사의 배려로 2부에 걸쳐 요약해 주는 특별판 같은 느낌이랄까?
막장 끝판왕의 스토리와 더불어 이 요약정리식의 쉬운 서술법이 결국 『바람의 그림자』를 명작의 끄트머리라도 잡으려 애썼던 이야기를 통속의 바람 속으로 밀쳐 넣은 셈이다.
"언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 있다."나는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는 누리아 몽포르트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페넬로페를 보내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이 이십 년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남긴 것이었다. 훌리안 카락스._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1933~1954년, 579쪽
어쩌면 작가 역시 그만의 이야기 감옥에 갇힌 건 아니었을까? 처음의 그 긴장감과 신비감이 스토리에 빠져 허우적대다, 죽일 사람 다 죽이고, 그 난리를 친 후 그래도 수습은 해야겠기에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고 다소 어이없이 평온하게 끝맺어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간혹 보이는 문장 속 통찰들을 건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진정한 작가는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쓰고자 할 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김연수 작가님이 추천사를 쓴 것이 의외였지만, 적어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의 그림자』 가 그런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https://m.blog.naver.com/luv0625/22253187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