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하네… 근데 이게 허망한게 맞나…?‘// 개망초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감정이 팽배했던 구한말에 들어왔으며, 번식력이 하도 좋아 밭에 조금이라도 피어났다 치면 금새 퍼져 농사를 망쳐버리는 주범이었어요. 몹시 원망스럽지만, 계란꽃이라도 불리는 이 꽃의 꽉 채워진 노란 속이 이곳 저곳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분명 구한말 사람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거예요. 그래도 어찌저찌 이 꽃은 미운 풀. 예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개망초. // <고래>에는 허물어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등장합니다. 아무 페이지나 펴고 난 뒤에 보이는 이름이 있다면, 분명 그는 허물어졌거나, 허물어 가거나, 앞으로 허물어 질 겁니다. 노파도, 금복도, 춘희도 그랬고, 불에 타버린 평대 주민들을 포함해 그 주변의 많은 인물들도 그랬어요. <고래>를 다 읽고 난 뒤, 그들 인생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허망하네.‘ 그러나 내뱉고 얼마안가 이런 자문이 듭니다. ’이게 허망한게 맞나..?‘ // ’비비안 마이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었어요. 그리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그리 남아있지 않은 채로요. 2007년 ‘존 말루프’라는 어떤 남성이 경매에서 한 무더기 박스를 구매합니다. 이를 언박싱해보니 장차 15만 장의 필름이었어요. 그는 누가 찍은 지도 모를 사진을 인화해보았고, 이 사진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그는 페이스북에 이 사진을 하나 둘 씩 올렸고, 이를 보는 많은 사람들도 이 사진작가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으며 좋아요를 마구마구 눌렀습니다. 그렇기에 존 말루프는 찾습니다. 이 사진작가를. 여러 단서들로 찾은 바, 이 사진을 찍는 사람은 ‘비비안 마이어’라는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난 여성이었고, 이어 밝혀진 놀라운 사실은 2009년 그녀가 죽는 날까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 <고래>의 3부 공장 에피소드를, 이 기나긴 이야기의 막바지를 읽으며 ‘비비안 마이어’가 생각났습니다. 반편이 춘희가 꾸준하게 만들어낸 벽돌과, 죽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몹시 비슷합니다. 사진은 담긴 피사체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있으며, 벽돌은 ‘타인’이 거주하거나 사용할 건물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춘희와 비비안 마이어는 이를 따르지 않았어요. // 이는 ‘벽돌의 법칙’’이 아니고, ‘사진의 법칙’이 아닙니다.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나 분명한 건. 춘희와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볼 때 어떤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는 점 입니다. 이는 고래의 거대함을 볼 때와 마주하는 경외심과 비슷합니다. // 목적과 법칙, 삶이 이룬 업적에 초점을 맞춰 그녀들을 본다면, 어리석다 할 수 있습니다.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으며 허망하다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래>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게 허망한 게 맞나..?’ // 이 지점은 소설, 영화의 본질 같기도 합니다. 허구로 짜여진 허구의 이야기. 엄밀히 말해 허망 덩어리. 간혹 소설을 왜 읽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짓의 이야기고, 읽고나서 남는게 뭐며, 시간낭비가 아니냐고요. 비문학은 정보를 제공하기라도 하는데, 도대체 소설의 유용성은 뭐냐고요. // 충분히 그렇게 물어볼 만 합니다. 김현 평론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에 유용한 것이다.“ // ’써먹을 데‘라는 점은, 유용성과 효율과 그로인해 파생된 00의 법칙을 품고 있습니다. 문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써먹을 데가 없어요. (굳이 써먹을 데를 찾자면 이 책 읽었다 자랑용 정도 입니다. 예를들어 “나 카라마조프 형제들 다 읽은 사람이야 왜 그래!”) 그럼에도 우리가 문학을 읽는 수 많은 이유중 하나는 무용을 품기 위해서 입니다. 유용(법칙)을 위해 날카로워지고 단단해지는 나를 무용해도 괜찮다 달래기 위해서,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법칙)으로 다른이에게 찌르던 창을 거두고 무용해도 괜찮다고 안아주기 위해서요. 이를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라고 뭉뚱그려 치환하는 일은 거칠긴 하지만 어느정도 맞는 말일 거라 생각합니다. // <고래>는 정말 허망한 이야기 입니다. 영화가 아닌 영화관을 만든 이야기며, 심지어 호텔 직원의 사소한 실수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실패한 이야기이고, 춘희에게 느껴질 경외심은 도자기 굽는 주인공과 재벌 2세 사업가의 로맨스로 바뀌어 버린 이야기입니다. (525) 춘희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비비안 마이어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래>를 읽고 나서 말할 수 있는 마음은 이것 뿐입니다. // “그 누구도 당신의 삶이 허망했다고 단언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