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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동네에도 정육점 주인이나 우편배달부, 목사의 부인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고도로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인간 생명에 대한 예우가 최소한도로 줄어든다. 정육점 주인은 고기를 배달하러 와서 현관 앞에 던져 놓고 가고, 우편배달부는 우체통에 우편물을 집어넣으면 그뿐이며, 목사의 부인도 편리를 위해 교회의 소식지나 공문서를 우체통에 같은 방법으로 꽂아두고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모두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도, 소식지를 읽는 흔적이 없어도, 목사의 지시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다.
-알라딘 eBook <블루&그린>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중에서
패니가 여전히 바닥을 두리번거리며 핀을 찾는 동안 크레이 선생님은 바닥에 떨어진 카네이션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정맥이 비치는 보드라운 손으로 카네이션을 으스러지게 뭉개는 것이었다. 진주로 장식된 물색 반지들을 낀 손으로 꽃을 짓이기는 모습이 패니는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손가락의 힘이 꽃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한껏 터져 나오게 하는 것 같았다. 더 화려하고, 더 신선하고, 더 순수하게. 크레이 선생님에게서 엿보이는 특이한 점, 어쩌면 그녀의 오빠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을 그것은 바로 이렇게 꽃을 뭉개고 으깨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영원한 절망감이 배어 있다는 것이었다. 카네이션을 손에 쥐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손에 들고 누를 뿐, 꽃을 소유하거나 감상하지 않았다. 전혀. 조금도.
-알라딘 eBook <블루&그린>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중에서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거절한다는 사실. 인상을 찌푸리고,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변명을 덧붙이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는 사실. 그렇다, 그녀는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여섯 시에 일어나 망토를 걸치고 켄싱턴에서 강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자연이 그 절정의 순간을 맞을 때,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장면을 보러 갈 수 있는 권리를 희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원한다면,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독립성을 희생하지 않은 것이다.
-알라딘 eBook <블루&그린>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중에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행은 모두 나무 위로 떠오르는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포효하던 런던이 잠잠해졌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모두 그 소년과 함께 별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탑 위의 소년 곁에서 황무지 건너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블루&그린>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