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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나는 그의 경멸을 살 만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나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곳만 높고 그 외의 것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구자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차제에 만사를 제쳐놓고 그를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의 머릿속이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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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보기엔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정말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는 여행지에서도 하숙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겁했습니다. K를 관찰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고답적으로 보이는 그의 태도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심장 주위는 까만 옻칠로 두껍게 감싸여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부어넣어주려는 피는 그의 심장으로 한 방울도 들어가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나왔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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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슈 반도의 끝을 돌아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걷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금방 동네가 나올 거라는 말에 속아 끙끙거리며 걸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걷는 건지 이유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반 농담으로 K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K는 다리가 있으니까 걷는 거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리고 더워지면 바다로 들어가자고 하고는 어디든 상관없이 바닷물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강렬한 햇볕 속을 걸어야 했기에, 녹초가 되어 몸이 늘어졌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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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속으로 딴사람에게 사랑의 눈길을 돌리고 있다면, 그런 여자와 평생을 함께하기는 싫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불문곡직 아내로 삼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세파에 닳고 닳았거나 아니면 사랑의 심리를 잘 모르는 바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습니다. 한번 아내로 삼고 나면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철리哲理를 수긍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열을 올리고 있었죠. 즉 나는 지극히 고상한 사랑의 이론가였던 겁니다. 그와 동시에 가장 멀리 돌아서 가는 사랑의 실천가였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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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거기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봤습니다. 아주머니와 따님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며 과연 두 사람의 마음이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일까 의심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 가슴속에 장치된 복잡한 기계가 거짓 없이 명료하게 문자반 위의 숫자를 가리키는 시곗바늘 같을 수 있을까 의문도 가졌습니다. 요컨대 똑같은 언행을 두고 요렇게도 받아들이고 저렇게도 받아들인 끝에 가까스로 내버려두기로 낙착을 본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엄밀한 의미에서 낙착이라는 단어는 결코 이런 때 써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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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냥 막연하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은, 그런 사랑의 늪에 빠진 자기를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는 얘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현재의 자기 모습에 대해 내 의견을 구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자꾸만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남의 생각에 좌우될 만큼 약하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한번 이거다 싶으면 혼자서 씩씩하게 나아갈 만큼 배짱도 있고 용기도 있는 남자였습니다. 양자 사건으로 그 성격을 마음속 깊이 새긴 내가, 이건 좀 다른 모습이라고 확실히 인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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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얘기를 끝내고 고이시카와의 하숙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비교적 바람이 없는 따사로운 날씨였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공원 안은 쓸쓸했습니다. 특히 서리를 맞아 푸른빛을 잃은 삼나무들의 다갈색이 어스레한 하늘 아래 우듬지를 나란히 하고 솟아 있는 모습을 돌아보았을 때는, 추위가 등을 파고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해질녘의 혼고다이를 총총걸음으로 지나쳐 다시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 고이시카와 비탈길 아래로 내려갔죠. 그제야 겨우 외투 속으로 몸의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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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나는 정직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딘 바보였습니다. 아니 교활한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것은, 그때까지는 하늘과 내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서는 당장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끼인 나는 또다시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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