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말없이 내 얼굴만 쳐다봤습니다. 그때 나는 얼른 아주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아주머니에게도 따님에게도 죄송하게 됐습니다”라고 사죄했습니다. 아주머니를 보기 전까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해버린 것입니다. K에게 사죄할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나마 아주머니와 따님에게 용서를 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즉 나의 본성이 평소의 나를 제치고 참회의 말을 술술 토해낸 것입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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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절에서 쓰는 향냄새 가득한 연기가 코를 찔렀고, 나는 연기 속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봤습니다. 내가 따님의 얼굴을 본 것은 어젯밤 이래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따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도 눈이 빨개져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때까지 우는 것을 잊고 있던 나는 그제야 겨우 슬픔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내 가슴은 그 슬픔으로 인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공포로 옭매여 있던 내 마음에 물 한 방울의 윤기를 떨어뜨려준 건 그때의 슬픔이었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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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이 지나도록 K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늘 불안했습니다. 이 불안감을 떨쳐버리고자 책에 파묻혀 살려고 애썼습니다. 맹렬한 기세로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목적을 만들어놓고 억지로 그 목적이 달성될 날을 기다리는 건 허상이기에 유쾌하지 않습니다. 나는 도저히 책 속에 마음을 파묻을 수 없었습니다. 또다시 팔짱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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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버지에게 속았을 당시의 나는, 남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절실히 느끼긴 했지만, 남만 나쁘게 여길 뿐 자신은 그래도 틀림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어떻든지 간에 나 하나만은 나무랄 데 없는 인간이란 믿음을 어딘가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K의 일로 그 믿음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어질어질해졌습니다. 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나는 자신에게도 정나미가 떨어져 활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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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끊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읽어도 읽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내한테 뭐하러 공부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나는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하지만 내심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슬퍼졌습니다. 이해시킬 방법이 있는데도 이해시킬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슬퍼졌습니다. 나는 적막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동떨어져 나 홀로 살아가는 듯한 생각도 자주 들었습니다. - <마음>, 나쓰메 소세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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