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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빠져나온 그들이 과연 지옥을 모르는 사람들과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한다.
You know, I'm broken.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생존자거든.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것은 무척 존엄하게 느껴지지만, 이 사회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는지라, 그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이반지하는 병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반지하가 나의 통합되지 못한, 혹은 억압된 페르소나였다면, 나는 일종의 인격장애를 예술로 만들었고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유로 괴상하고 혼란스럽고 통합될 수 없는 인격들이었던 게 아닐까.
이반지하는 혼돈이다. 이반지하는 간단명료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반지하는 정의할 수 없고 어떤 카테고리 하나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렇게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만나는 곳이 이반지하인 것은 아닐까.
당신들이 내가 무엇이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다음 순간, 나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닐 테니까.
반주 음원이 생기자 이반지하는 신체를 전보다 더 본격적인 퍼포먼스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을 얘기할 수 있는 상황들이 만들어졌다.
세상에 내놓고 세상이 고민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김소윤과 이반지하는 하나였다가 둘이었다 마구 섞였다 하며, 그 자체로 괴상하고 별스러운, 언어가 언제나 못 미치는 '퀴어의 삶'이 되었다.
닉네임이나 부캐 같은 게 아니라, 한국에서 퀴어예술가로 산다는 것 자체였을 뿐이다.
김소윤으로부터의 방어막 혹은 거리감이 필요했다. 김소윤에는 '나'에 대한 여러 층위의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소윤으로 태어나 저절로 맺어져버린 관계들을 나는 절실히 외면하고 싶었다.
유튜브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이 절대 섞지 말라고 당부하던 일과 생활은, 갈라전 적이 있기는 했냐는 듯 한 번 경계가 흐려지자 곧장 하나의 거대한 슬라임이 되어 엎치락뒤치락 제멋대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나는 비운의 예술가성에 잔뜩 취해, 유사 고흐가 되어 으, 내 테오 새끼 어딨나 하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봐도 아주 야무지고 옹골찬 요구사항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요구를, 욕망을 멈출 생각은 없다. 절대로 검소한 태도를 갖지 않을 예정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모두 쫙 펼칠 수 있는 순간과 공간을 감히 계속 꿈꾸면서, 에라 한번 사는 것이다.
우리는 노가리나 까고 헛소리나 하고, 이럴 때...... 이야, 세상은 요런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고. 내가 소외된 줄도 몰랐을 때가 진짜 소외거든요.
나의 집이라는 곳은 작업할 때는 생활의 향기에 돌아버릴 것 같고, 집에서 쉬려고 할 때는 일의 향기에 헛구역질나는 곳이 되었다. 집에 작품이 차올라서 발에 차이기 시작하고, 벽에 붙여놓은 종이그림에 계란후라이 기름이 튀기 시작하자, 이 모든 예술작품이라는 놈들이 너무 징그러운 마음과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소중히 관리하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듯이 번갈아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서는, 아니 쓰벌 이제 온라인 월세까지 내야 한단 말인가! 개탄하며 각종 클라우드 선생들에 기막혀했지만, 어쨌든 영상 작업이 안겨준 물성의 해방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정말 사랑받고 싶었다.
나는 몰래 섹스를 하고 다녀서 그랬는지 대학에 떨어졌고, ...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검열’에는 ‘검열의 언어’를 따로 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듣는 순간 바로 ‘이건 검열이다!’라고 눈치챌 수 있을 만한 언어 말이다. 나는 내가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열의 언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나의 미술적 재능과 판단이 그렇게 부족한가 하는 의문에 쉴새없이 시달렸다.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이렇게 재밌는 걸 그동안 퀴어들만 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요, 저도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퀴어 어쩌고가 아닌 곳에서도 내 끼와 유머가 먹힐 줄이야. 네, 그것도 이제 와서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퀴어’가 그들과 그리 다른 인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개개인의 개별성과 저마다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훨씬 더 피부에 와닿게 경험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퀴어와 헤테로를 대립구도로 보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다 ‘퀴어’라고, 실상은 헤테로가 퀴어의 하위범주라고 인지한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으로 이상한 변태들일 뿐이고, 그것은 헤테로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변태 헤테로들이 많은가. 그들의 헤테로 실천은 얼마나 다 각각 별스럽게 다양하고 잡스럽고 문란한가. 헤테로는 충분히 퀴어하다. 근데 또 그렇다고 헤테로들이 대거 ‘나도 퀴어’라고 말하면 좀 비위에 거슬릴 것 같긴 하다. 뭔가 얄밉달까. 누릴 거 다 누리고 요거까지 해먹으려고 하냐 그런 마음이 들긴 한다.
한번은 자살충동으로 힘들어하는 사연을 보낸 이에게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잘라서 살자는 이야기를 했다. 평생 살 생각 하면 너무 힘드니까, 5년, 3년, 1년, 6개월, 한 달, 일주일, 하루, 열두 시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쪼개서 생각하고, 일단 딱 거기까지만 살아내보기로 결심하는 것은 내가 나의 심리와 정신건강을 챙기면서 배우게 된 생각법이었고, 그것이 진심으로 사연자에게 가닿기를 바랐다. 퀴어들에게 삶의 구심점이 되어줄 우리만의 관혼상제를 챙기는 일 역시 너무나 중요하다. 비단 퀴어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성애로 생성된 정상가족의 틀에서 삐져나와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제사처럼 특정 성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닌, 얼굴 마주하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서로를 챙기는 만남으로서의 파티는 개인을 넘어 커뮤니티의 건강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원해서 태어난 적 없는 우리가 이 삶을 산다는 것, 버텨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필요한 활동이라서, 주기적으로 “이야! 우리 여기까지 살아냈다!” 하면서 구심점을 잡아주고 축하하는 것이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비자 선생들께 후원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이 문화에 대해, 나라는 존재가 생존하고 있고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음에 대해, 이 존재에 대한 비용을 치러달라고 당당히 요청하고 싶었다.
내 예술이, 내 팬들의 2차 창작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함에 나는 분노한다. 이토록 쉽게 불법적인 신체와 이미지가 되어 불쾌하다. 진짜 나쁜 짓 하는 애들의 자유는 막 더 복잡하게 보호받고, 우리들의 자유는 단순하고 명쾌하게 침해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웅, 설마 아니겠지? 혹시 ‘성’이랑 관련되면 다 복잡하니께, 우선 때려잡고 생각해보자, 그러는 거 아니겠지? 근데 이게 님들이 말하는 우리 피해의식인 건 맞죠?
언제더라. 작년이었나 올해였나.
친구가 자신의 장례식에서는 비건 육개장을 내달라는 유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얘기를 듣자마자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왜냐면 그것은 너무나 성소수스러운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죽음까지 올바른 그 플랜에 경악한 나를 보며 친구는 억울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빠르게 덧붙였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뭐가?), 비건식이 아니면 장례식에서 먹을 게 없는 친구들이 있단 말야. 나는 걔네가 내 장례식에 와서 아무것도 못 먹고 가는 게 싫어서 그래.”
물론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그래도 그것이 성소수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르고 인위적인 죽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삶 속에서 장례식과 조문객, 대접할 음식까지를 생각하는 데 걸맞은 나이나 때는 우리에게 없는 것 같았다.
퀴어 친구들은 일단 ‘살기’부터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살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런 생각보다 일단 우리 생명 유지부터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