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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는 내가 저녁 여덟시에 찬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꾸지람을 들었는데, 서울에서는 엄마가 마치 다시 아이가 된 양 작전을 주도했다. 우리는 검푸른 어둠에 싸인 꿉꿉한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갖가지 반찬이 꽉꽉 들어찬 터퍼웨어 통을 모조리 열고 함께 그것들을 집어먹었다. 밥솥 뚜껑을 열어놓고 그 자리에서 뜨끈뜨끈한 보라색 콩밥을 한 숟가락 가득 입에 퍼넣고, 달콤하게 조림 검정콩, 파와 참기름을 넣고 아삭하게 무친 콩나물, 한입 베어 물면 시큼한 즙이 입안 가득 퍼지는 오이김치를 번걸아가며 정신없이 퍼먹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서로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간장게장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토실토실한 생게 다리를 쪽쪽 빨았다가 혀끝을 껍질 사이로 밀어넣었다 하면서 짭조름하고 몽글몽글한 살을 발라먹는 틈틈이 손가락에 묻은 간장을 핥아먹었다. 엄마는 깻잎 조림을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서 말했다. “넌 진짜 한국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