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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를 매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번역을 하는 사람은 확실히 존경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읽은 내용을 그대로 요약하는 것자체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닌데, 아직 부족한 실력 때문에 원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 언어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언어 천재 또는 어떤 장벽 너머의 존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황석희 번역가가 천재가 아니라는데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조용한 방구석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은 부풀려진 성공신화가 아니다. 그저 현실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며 작은 성취를 수집하다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것뿐이다.
번역: 황석희는 한 문장, 한 단어의 늬앙스를 한 줄에 열두 글자라는 극한의 조건 안에서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전문직 프리랜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남몰래 속좁고 치사하게 구는 보통의 사람 황석희가 영화 번역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며 떠올린 생각들을 모은 책이다. 다소 진지한 내용이 가볍고 유쾌한 어체로 서술되어 있어 읽기에 편안했다. 매체에 노출된 그를 거의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은 이후, 마트에서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카트를 끄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이 그려져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달까. 다음 주에 있을 독파 챌린지 북토크에서 뵐 예정인데 무척 기대가 된다.
올해 개봉하는 <데드풀과 울버린>의 번역을 맡으셨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마지막 장면 이후 ‘번역: 황석희’라는 자막이 나온다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꽤 반가울 것만 같다. ‘저 사람 그때 나 북토크에서 봤던 사람이야’라고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