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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한스의 가슴은 슬픔과 수치심으로 쿵쿵 뛰었다. 얼어붙은 들판을 비틀거리며 걷는데 추워서 새파래진 뺨 위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 잊을 수 없으며,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실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것에 누워 실려가는 것이 재봉사의 아들이 아니라 친구 하일너 같았다. 하일너가 그의 배반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싣고 멀리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듯했다. 성적과 시험과 성공이 아니라 양심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다른 세상 말이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천재와 교사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교사들은 천재적인 아이들을 학교에서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들이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한다. 교사들에게 천재란 교사들을 전혀 존경하지 않고, 열네 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열다섯 살에 사랑에 빠지고, 열여섯 살에 술집에 드나들고, 읽지 말라는 책을 읽고, 도발적인 글을 쓰고, 교사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고, 교무수첩에 선동가와 감금형 후보로 기록되는 존재이다. 교사들은 자신이 맡은 반에 천재가 한 명 있는 것보다 차라리 멍청한 바보 몇 명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생각하면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교사의 임무는 지나치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라틴어나 산수를 잘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보통 사람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한스는 엄숙하면서도 온화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력한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을 잡았다.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교장은 한스의 손을 꼭 잡았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교장이 그를 다시 불렀다.
“좀더 물어볼 게 있네, 기벤라트. 하일너와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던데, 아닌가?”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옛날엔 1년 내내 매달마다 뭔가를 애타게 기다렸다. 건초를 만들 때를 기다리고, 토끼풀을 벨 때를 기다리고, 그해 처음으로 낚시를 하러 가거나 가재 잡을 때를 기다리고, 맥주 원료인 홉을 수확할 때를 기다렸다. 또 자두나무를 흔들어 자두를 딸 때를 기다리고, 감자를 수확하고 모닥불을 피워 감자 줄기를 태울 때를 기다리고, 곡식 타작이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기분 좋은 일요일과 휴일을 기다렸다. 옛날엔 신비스러운 마법의 힘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 아주 많았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늙은 포르슈는 경건한 경구와 상관없이 유령이나 그 비슷한 존재들에 대한 전설 같은 수상쩍은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귀신이 돌아다니는 곳을 알고 있었으며, 항상 스스로의 이야기를 믿을지 안 믿을지 망설이곤 했다. 그는 대부분 자신도 믿지 않는다는 듯 허세를 부리며 내던지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꼭 자신이 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스스로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리고 목소리를 점점 낮춰 결국 나직하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은 섬뜩한 속삭임으로 말을 끝맺곤 했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그는 이제 가을 들판을 거닐며 계절의 힘에 굴복했다. 깊어가는 가을, 조용히 떨어지는 낙엽, 갈색으로 변하는 풀밭, 짙은 아침안개, 기력이 다해 죽어가는 식물들. 그런 것을 보면서 그는 모든 병자가 그렇듯 무겁고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슬퍼졌다. 그는 그것들과 같이 스러지고, 같이 잠들고, 함께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젊음이 그것을 거부하고 조용하고 끈질기게 삶에 매달려서 마음이 괴로웠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한스는 에마가 정원 울타리까지 자신을 꼭 안고 부축해준 것도 몰랐고, ‘안녕’ 하는 소리도 등 뒤에서 쪽문이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떻게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꼭 큰 폭풍에 휘말리거나 요동치는 세찬 파도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그는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희미한 집들과 저 위 높은 산등성이와 전나무 우듬지, 그리고 깜깜한 밤의 어둠과 쉬고 있는 큰 별들을 보았다. 바람을 느끼고, 다리 기둥을 지나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듣고, 강물에 비친 정원과 희미한 집들과 밤의 어둠과 등불과 별들을 보았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그렇게 한스는 어쩌면 너무 일찍 사랑의 비밀을 맛보았다. 그것은 살짝 달콤하고, 많이 썼다. 며칠 낮을 부질없는 한탄과 애타게 그리운 기억과 암담한 생각으로 보내고, 며칠 밤을 가슴이 뛰고 조이는 느낌에 한숨도 못 자거나 끔찍한 꿈을 꾸었다. 이해받지 못한 그의 피는 꿈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환상의 그림이 되고, 죽일 듯 몸을 휘감는 팔이 되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이 달린 상상의 동물이 되고, 현기증이 날 만큼 깊은 심연이 되고, 활활 타오르는 엄청나게 커다란 눈이 되었다. 잠을 깨면 그는 혼자였다. 싸늘한 가을밤의 고독에 싸여 그는 그리운 에마 생각으로 아파하고 신음하며 눈물 젖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
“흥분하지 마세요, 기벤라트 씨! 그냥 학교 선생님들에 대해 말한 것뿐입니다.”
“어째서요? 도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아,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버님과 저, 어쩌면 우리도 그 아이한테 소홀했던 것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작은 도시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는 강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저 멀리 전나무 숲이 우거진 푸른 산이 부드럽게 애타는 그리움으로 아스라이 보였다. 구둣방 주인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기벤라트의 팔을 잡았다. 기벤라트는 그 시간의 정적과 기묘하게 괴로운 수많은 상념에서 깨어나, 당황한 표정으로 익숙한 자신의 삶의 골짜기를 향해 머뭇머뭇 걸음을 내디뎠다
-알라딘 eBook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