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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 년이 되었다. 한참 북쇼핑과 책 굿즈에 빠져 있었던 때 '편집자 k-현재는 문학동네 편집자인데 북튜브를 통해 문학동네뿐 아니라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영역의 책을 소개해 준다. 느낌이 맞아 그녀의 선택에 많은 책을 영업당했지만, 후회한 적이 거의 없다.-'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니콜 크라우스라는 작가는 몰랐지만, 글을 잘 쓰는 작가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 3권이 리커버로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대한 집』과 함께 사 두었는데, 독파에서 마침 『사랑의 역사』 읽기를 한다고 하니 이참에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일 년간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꺼냈다. 『사랑의 역사』 표지가 예뻐 표지를 그대로 옮긴 패브릭 포스터와 우산까지 굿즈 싹쓸이도 했었다. 그땐 그냥 예쁘다는 생각만 하고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Pablo Gallo라는 스페인 작가의 'Lectora2'라는 작품이었다. 어쩐지 그림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책날개를 꼼꼼히 본다 하면서도 이렇게 놓치고 지나치기 일쑤다.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고, 그는 한 소녀를 사랑했으며, 그녀의 웃음은 소년이 평생에 걸쳐 답하고 싶은 질문이었다._지상에서 하는 마지막 말, 22쪽
『사랑의 역사』는 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소녀와 소년이 주변의 상황에 의해 헤어지고 난 후 소년은 그 후로 괴팍한 노인이 되어 오로지 소녀와의 사랑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소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까진 별로 감흥이 오지 않을 로맨스 영화에 많이 나오는 스토리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부라면 이 책이 이리 유명해지진 않았겠지.) 만약 이 사랑의 이야기만 있었다면 그저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영화나 로맨스 영화의 흔한 스토리에 지나지 않을 그렇고 그런 통속적인 이야기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글로 쓰여지고, 그 글이 우연히 발견되어 책이 되고 그 책은 두 쌍의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가 된다.
『사랑의 역사』는 레오 거스키와 앨마 싱어, 그리고 즈비 르트비노프 세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다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날 죽지 않기를 바랄 뿐, 11쪽'인 열쇠수리공 레오 거스키와 '아빠와의 사랑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72쪽' 못한 엄마를 보며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 한 가지는 사랑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만 버티는 법을 배워서, 내 이름을 딴 종의 시조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것, 85쪽'이라 생각하는 소녀 앨마 싱어, '초판본 이천 부 중에서 일부는 구매되어 읽혔고, 다수는 구매되어 읽히지 않았으며, 일부는 선물로 주어졌고, 일부는 서점 진열장에 놓인 채 바래가면서 파리들의 착륙장이 되었고, 일부에는 연필로 표시한 부분이 생겼으며, 상당수는 폐지 압축기에 들어가 아무도 읽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다른 책들과 함께 재생지 원료로 갈가리 찢겼고, 그 안의 문장들은 기계의 회전 칼날 속에서 분해되고 분쇄, 109쪽'된 『사랑의 역사』의 작가 즈비 르트비노프 세 사람의 외롭고 불안하며 불행하다 싶은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챕터별로 무심하게 이어진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이야기 형식인가? 옴니버스 형식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도대체 이 세 사람은 무슨 관계인것인지? 전혀 어떤 연결고리도 찾지 못하고 그저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긴장하며 읽어가고 있었다. '경이롭고 여운이 긴 다층적인 작품, 뒤얽힌 미스터리는 마음을 빼앗고 등장인물들은 뇌리에 깊이 남는다'는 마이애미 헤럴드의 리뷰가 어쩌면 이 책을 가장 명확히 설명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관계와 이야기의 긴장감을 따라가느라 중간에 끊을 수 없이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역사』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레오와 앨마 그리고 즈비의 이야기는 이야기뿐 아니라 형식도 달라, 읽으면서 다양한 이야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황혼에 있는 레오의 이야기는 『칼의 노래』를 생각나게 하는 문체로 문장과 문장이 시를 읽는 듯 이어지며 자칫 숨 고를 타이밍도 놓치게 할 만큼 문장의 몰입도가 높았다. 특별히 아름다운 글들도 아닌데 끝말잇기처럼 문장과 문장이 어울려 이어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문체로 탄복하며 읽게 된다.
10대 소녀 앨마의 이야기는 그녀의 캐릭터와 고민에 맞게 일기 형식으로 레오의 이야기에서 한껏 긴장했던 마음에 조금 여유를 갖게 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문장이다. 레오와 앨마의 이야기가 1인칭 형식으로 진행되면서 각기 다른 경험의 몰입감을 준다면, 즈비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으로 넘어가 전형적인 소설의 이야기 형식이다. 하지만 분위기만은 가장 무겁고 어둡다.
최초의 여자는 이브였는지 몰라도, 최초의 소녀는 언제까지나 앨마 일 것이다. _엄마의 슬픔, 89쪽
『사랑의 역사』는 제목 그대로 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사랑으로 비롯된 사람들의 관계와 삶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오와 앨마(앨마 메러빈스키), 앨마 싱어의 엄마 아빠인 다비드와 샬럿, 그리고 즈비와 로사 세 쌍의 사랑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역사』 책과 연관된 인연이 밝혀지는 미스터리 같기도 한, 참으로 보기 힘든 형식과 내용의 책이다.
각기 다르지만 절실하고 슬픈 세 쌍의 사랑 이야기들이 나올 때는 마음이 짠하며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지다가, 레오와 즈비의 인연, 그리고 레오와 앨마 싱어의 인연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되면 이렇게 이야기가 연결될 수도 있구나 하는 충격에 잠시 멍해지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능했던 인생과 우리의 지금 인생 사이에 놓여 있던 문은 우리 눈앞에서 닫혀버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내 삶의 문법은 이렇다. 경험 법칙에 따라, 복수형이 나오면 항상 단수형으로 고친다. 그 고귀한 우리라는 말은 무심코 흘러나오더라도 신속히 머리에 일격을 가해 비참함에서 벗어난다._영원한 기쁨, 134쪽
평생 단 한 번의 사랑 이후 오로지 혼자였던 레오의 외로움과 이젠 허물과도 같이 나이 든 육신만 남은 늙은 레오가 세상에 대해 어깃장을 놓는 모습은 되려 측은함이 느껴진다. 세상에는 그다지도 독기 어린 말을 뿜어내면서도 자신의 불행한 운명과 외로운 운명에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나 바라는 게 있는데, 엄마가 ······"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뭘?" 엄마가 팔을 벌리며 물었다.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말했다. _ 물속에 잠긴 내 인생, 308쪽
참고 참았던 진심을 전하는 앨마의 이 말이 너무도 먹먹했다. 사랑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선사하지만,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어쩌면 그 사랑의 시간보다 더 깊고 긴 어둠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 같다. 죽은 아빠를 잊지 못하고 자신을 놓은 채 살아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앨마와 버드 남매가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사랑하는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고귀한 사랑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사랑의 역사』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이자, 사랑에 대한 상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오가 사랑의 상실을 세상에 대해 뻣대며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켜 살아간다면, 샬롯 역시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아이들에 집착하며 자신은 세상에 없는 사람인 양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킨다.
가끔 한 번씩 충동이 생기면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 :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는가? 아니요. 질문 : 엉덩이에는? 아니요. 질문 : 심장이 뛰는가? 예._A+L, 350쪽
수백 가지 일들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__A+L, 351쪽
레오의 이 질문들이 왜 가슴을 치는지 모르겠지만, 간혹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 던지면 좋겠구나! 와닿았다. 그렇다. 간혹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된걸까? 어떤 한가지 이유만을 집요하게 쫓아 그 원인을 집중 공격하며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그때 그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달라졌을텐데.' 하지만, 나를 거쳐간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백 가지 일들이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들어 놓았다는 걸.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든 원치 않은 방향이든 흘러가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 뭔가 한 가지 탁 짚어 그것에 기대어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들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책이자 인생에 대한 책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늙은 할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열 살 때 사랑에 빠진 소년을 보았다._A+L, 370쪽
정말이지, 별로 말할 것은 없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_레오폴드 거스키의 죽음, 375쪽
지금까지 이런 마지막을 본 적이 있었는지, 마지막 챕터 한 장 한 장은 거의 숨을 참고 넘겨야 할 만큼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빼곡한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한 쪽에 두 문장, 세 문장인 쪽도 있지만 그 한 문장 속에 그동안 있었던 사랑의 역사에 대한 비밀이 다 담겨있다. 그 당혹스러움, 그리고 놀라움은 오로지 니콜 크라우스만의 글의 매력이다.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가 남긴 잘린 키스씬들을 보는 토토가 된 것 같이, 지금까지 읽은 책장들이 흩날리며 그동안 읽었던 이야기들이 한 장 한 장 흩어져, 영화의 장면들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의 역사』를 읽어보면 이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앨에게, 언젠가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은 그것을 그리고 싶어한다고 썼어. 삼촌이 널 그릴 수 있다면 좋겠구나. _아니라면 아닌 거지, 279쪽
『사랑의 역사』를 읽다 보면 저절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야기가 영상이 되거나 그림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이 탓이거나 아니면 메마를 대로 말라버린 나의 로맨스 감성 때문인지 소설로서의 아름다움과 이야기의 탄탄하고 긴밀한 구조에 비해,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선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보여주는 니콜 크라우스의 문장에는 경탄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건 순전히 나의 로맨스 감성 문제임을 인정한다. 사랑 그 따위거, 뭐 이런 마음이 자리잡은지 오래라. 좀 시시하다 생각되기도 하고. 암튼 이건 순전히 나의 '사랑 불신론'에서 비롯된 것이지 소설의 잘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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