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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들 잘되는 건 단순하고 심플하게 한결같이 잘되는 것 같고, 나는 복잡하게 안 되는 것 같잖아요. 실은그게 아닌데.
포부가 있었다. 그 징글징글한 포부 말이다. 그렇게 신물나게 겪어놓고도 한국 노동시장이 내게 생계 이외의 에너지나 시간을 허락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기대 아니면 절망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 이게 예술한다고 나댄 벌인가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는 예술을 용서하지 않아!
사람들은 왜 노동자가 앉아 있는 것에 그렇게 미치는 걸까.
지금 이삼십대, 사십대까지도 사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평가를 당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데요. 그래서 어차피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만큼 어차피 될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저는 좋은 것 같아요. 왜냐면 결국 되거나 안 되거나라면, 어차피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잖아요.
무엇이 결정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일을 이룬 다음에 회고하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에 그 결정타를 준비해서 치는 건 힘든 것 같아요.
경쟁에서 뽑히는 사람이 적을수록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거잖아요. 그렇게 대단해서 패배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에요. 거절이란 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이유로 행해지는 게 아니라되게 흔하고 평범한 경험이니 그걸 너무 한계라고 견고하게 느끼지 않길 바라요. 그리고 그 거절과 패배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결정타가 될지 모른다는 거.
나는 보지 않아도 그가 최대한 자기의 안쪽 다리와 평행하게 막걸리를 들어, 자신이 무엇을 계산하려 하는지 가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다양성은 읽거나 들을 때는 고귀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축이지만 실제 인간군상 버전으로 만나게 되면, 음, 그것은 좀 많이 그렇다. 다양하다는 것은 정말 혹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치도록 다양하며 각자 다른 사정으로 살벌하게 부대낀다.
내가 궁금한 것은 크고 작은 전투나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낸 여러 층위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이었을 그 일을 왜 또 꺼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떠나버린 시간을 이야기한 자들은 또 버텨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인간이 버틸 수나 있는 것인지.
왜 자꾸 그 기억을 그리는 줄 아나요? 왜냐고 묻자 그는, 다룰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에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에 기억을 잡아두려는 시도, 그 맹랑한 시도 자체가 마치 그 기억을 종이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마치 그 기억이 그 종이만해지기라도 할 듯한, 그런 착각. 하지만 맹랑해서 그 나름대로 위대할 착각. 그 착각 없이는 삶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서.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애초에 성게가 껍질째 위장에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면 제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버린다. 원하고 원하지 않았고 따위는 처음에나 원망조로 따져보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게를 꺼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몸은 성게에게 훑어진 후니까, 그 이전의 상황 같은 것은 다신 없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잊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견디고자 하는 가냘픈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냥 화장실 타일과 벽지가 나를 매일 절망하게 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원목가구 하나 없이 사는 것은 괜찮을까.
나는 젠더에 너무 갇혀서 또는 갇히지 않아서 돌아버리곤 한다. 그리고 결국 그 돌아버림 자체가 나의 젠더임을 마지못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젠더가 지독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살짝 정신과도 소풍처럼 들러준다. 약도 고명처럼 곁들여본다. 스스로의 존재를, 젠더를 견디는 것은 이토록 인간의 생을 관통하는 고행인 것이다.
섹스가 정말 좋은 거였으면 우리가 하고 있을리가 없어.
적절히 약을 먹어가며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지 않는 세련된 정신병자
적절한 정신병자로서의 품격
화장실을 가야 할 때도 그 움직임에 힘이 필요하다는 것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고 그냥 당신만 살아서 오라는, 그 대단한 두 팔 벌림 앞에 섰던 강렬함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살면서 그런 호의를, 받아들여짐을, 이곳에 당도해냈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졌던 잠자리와 밥과 어메니티를 어떻게 잊을 수가. 나는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어메니티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