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쪽
98쪽
적들은 아침에 왔다. 일출 무렵에 바람은 잠들었다. 해가 떠오르자 아침 안개는 스러졌다. 보름 사리의 북서 밀물이 명량의 멱통에서 소용돌이쳤다. 허연 파도들이 말떼처럼 출렁거리며 목포 쪽으로 몰려갔다. 물보라가 날렸다. 진도 동쪽 해안 금날산 묏부리에서 연기가 올랐다. 봉화는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옮겨 붙었다. 금날산 봉화를 용장산이 받았다. 용장산을 벽파진이 받았고, 벽파진을 망금산이 받았다. 산봉우리들을 건너뛰며 연기는 다가왔다. 물 건너편 망금산 봉화 연기는 눈을 찌를 듯이 가까웠다. 삼지원 쪽 망군 한 명이 선착장으로 들이닥쳤다. 망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에 쓰러졌다.
102쪽
쇠나팔이 울렸다. 나팔 소리는 꼬리를 높이 쳐들고 떨렸다.
103쪽
사부들에게는 아직 화약과 화살이 지급되지 않았다. 흔히 겁에 질린 사부들은 적선이 눈에 띄면, 아득히 먼 적들을 향해 쏘아댔다. 그들은 적을 쏘지 않고 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쏘았다. 그것이 그들의 위안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104쪽
물결은 우우우 울며 내달았고, 이물은 솟고 또 곤두박질쳤다. 배를 따라 이동하는 갈매기들이 멀리서 너울거렸다. 우짖는 새떼를 앞세우고, 적들은 오고 있었다.
106쪽
바람의 흐름이 끊어질 때마다 우수영 쪽 산꼭대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자들의 울음처럼, 그 울음은 맹렬했고 다급했다.
108쪽
물러설 자리는 넓었지만, 물러서서 살 자리는 없었다.
112쪽
적의 후미 너머 먼바다에서, 다시 거꾸로 돌아서는 보름 사리의 썰물이 대낮의 햇빛 속에서 반짝였다. 그 물비늘 빛나는 먼바다까지, 이 많은 적들을 밀어붙이며 나는 가야 할 것이었다. 거기서 존망의 길이 어떻게 뻗어 있을 것인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조금씩 일렁이던 물길의 가운데가 허연 갈기를 세우며 일어섰다. 물결은 말처럼 일어서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살을 버티려는 적들의 노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15쪽
깃발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물살이 함대를 목포 앞 암태도까지 데려다줄 것이었다.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돌아갔다. 목포 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펼쳐졌다. 해남 쪽 바다에 보름달이 떴다.
117쪽
군량은 명량에서 깨어진 적선에 올라가 빼앗은 쌀이었다. 모두가 적들에게 빼앗긴 연안 백성들의 쌀이었다.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설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124쪽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125쪽
초겨울의 물소리가 날카로웠다.
126쪽
수면을 훑는 바람이 밀물로 달려드는 물결을 거꾸로 때리면 뒤집히는 물결이 곤두서면서 흰 칼날들이 일어섰다. 포구에 묶인 배들이 서로 뱃전을 부딪히면서 삐꺽거렸고, 배를 끌어올린 장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언 몸을 녹였다.
132쪽
하루 종일 물의 칼들이 일어셨다. 저녁 바다는 거칠었다. 인광의 칼날들이 어둠 속에서 곤두서고 쓰러졌다. 캄캄한 바다에서 칼의 떼들이 부딪혔다. 물보라가 수영 안마당까지 날아들었다. 섬도 수평선도 보이지 않았다. 연안의 읍진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서 닿을 수 없이 멀어 보였다. 밝는 날 녹진, 금갑진, 벽파진, 남포, 가리포가 그 오목하고 날룩한 포구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인지 믿기 어려웠다.
137쪽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 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140쪽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144쪽
저녁이면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라색으로 타올랐고 눈보라 속에서 출렁거리는 산들의 능선 위로 백두산은 차갑고 높았다. 그때 나는 서른세 살의 젊음이었다. 노루를 계곡으로 몰아내리고, 눈에 빠진 노루를 쏘아 병영으로 끌고 와서 구워 먹었다. 노루고기는 향기로웠고 허파 가득히 밀려드는 찬바람은 달았다. 그때, 베어야 할 것들 앞에서 종팔품 젊은 권관의 칼은 날래고 순결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써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151쪽
허벅지와 어깨에 적의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산 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면의 분노를 생각했다.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밀려내려 갔던 울음은 다시 잇새로 새어 나오려 했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면의 죽음을 알아챈 종사관과 군관들은 내 앞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152쪽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