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있어서 그랬을까,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책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읽지 않은 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가 눈이 멀게 된다. 그 후 하나의 전염병처럼 그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눈이 멀게 되고, 최초로 눈이 멀게 된 몇 명의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전염병을 통제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수용되게 된다.
그 중엔 처음으로 눈 먼 남자를 진료한 의사의 아내도 있는데,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의사의 곁에 있기 위해 눈이 멀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의사와 함께 수용소로 향하게 된다, 자기도 곧 눈이 멀 거라고 생각하며.
처음에 수용소에 수용된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을 때는 어느 정도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했지만, 점점 인원이 많아지게 되면서 수용소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사회가 형성되어 온갖 문제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분배되는 음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 자신의 먹을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사람을 모아 힘을 과시하며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무리들, 그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음식을 통제하는 무리, 매우 야만적이게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각 호실별로 여자를 제공하기를 바라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까지.
여성의 몸을 담보로 음식을 제공받는 비겁한 남성들ㅡ아마 이 소설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고, 또 앞으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이라 더 소름돋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결국, 그 때까지도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가 무리의 두목을 가위로 찔러 죽이게 되고, 의사의 아내의 도움을 받은 한 눈 먼 여자가 무리의 병실에 불을 지름으로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때서야 알게된 바깥 상황, 이미 세상의 모든 사람들ㅡ의사의 아내를 제외하고ㅡ이 눈이 멀고 세상은 무정부 상태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내 것ㅡ내 집, 내 차ㅡ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NOMAD처럼 무리지어 음식과 쉴 곳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
의사의 아내와 그녀를 따르는 무리들도 의사의 아내의 눈에 의지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가 갑자기 시력을 회복하고, 여기 저기 사람들이 다시 시력을 회복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처음엔 왜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읽어가며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의사의 아내가 혼자 지니게 된 이타심, 자기 무리를 지켜주려는 책임감.
의사의 아내가 혼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지켜야 하는 중압감을 감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과연 나였으면 인류애를 끌어 모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눈이 멀지 않았다는 걸 무기삼아 내 이익, 나와 내 가족의 이익만을 지키려 하지는 않았을런지. 과연 모든 사람이 눈이 먼 상황에 나 혼자 눈이 멀지 않았다면 그게 무기가 될 수 있기나 했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장 끔찍했던 건 그러한 팬데믹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는 그 짐승같은 인간들의 욕심.
그리고 음식이라는 한정된 자원에 묶여 그런 짐승같은 인간들에게 반기를 들기 못하고 비겁하게 여성들을 제물로 바친 무기력한 남자들.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이라ㅡ과거에도 있었던 일이고ㅡ더 슬프게 와닿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