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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이 '사랑의 역사'라는 제목은 뭔가 전형적이면서 지루한 느낌이었다.
마치 대학교 교제 같은 느낌?
그래서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 '독파' 챌린지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다.
독파 챌린지 책 소개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 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설명도 좀 전형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끌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감정은 먹먹함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이 순전히 타의에 의해 어그러져버린 레오 거스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가 낳은 자신의 아이가 눈앞에 있는데도 다가가지 못하고 곁만 맴돌게 된다.
그들의 감정이 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비극이다.
고향을 떠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다 자신의 사랑을 만났고, 그 사랑을 떳떳하게 이루기 위해 맡아두고 있었던 친구의 글을 자신이 쓴 걸로 위조해 출판한 즈비 리트비노프.
아버지가 죽고 그 죽은 아버지와 함께 죽어가고 있는 듯한 어머니를 구해내기 위해 애쓰는 딸, 앨마 싱어.
그들의 이야기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매개로 해서 엮여 나간다.
'사랑의 역사'는 레오 거스키가 썼고, 즈비 리트비노프가 자신이 그 글의 저자인 양 출판했으며, 앨마 싱어의 어머니가 레오 거스키의 아들인 아이작에게 번역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물들은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뒤틀려버린 상황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
친구의 글을 자신의 글인 양 출판한 즈비 리트비노프 역시 죄책감으로 힘들긴 마찬가지다.
레오 거스키가 죽었을거라 생각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죄책감이 더 심해진다.
오히려 그의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도 자신의 남편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유일하게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 그 아내이기도 하다.
세 명의 인물이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구조인데, 그 부분이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느냐에 따라 시작 부분의 그림이 다르다.
레오 거스키는 심장 그림, 앨마 싱어는 가운데 별이 들어있는 동그란 펜던트 그림, 즈비 리트비노프는 책을 넘기는 그림이 그것이다.
사실 그 세 파트 중에 가장 읽기 힘들었던 건 즈비 리트비노프 파트였다.
그의 삶을 이해할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이기적인 면이 싫었고, 그의 아내는 더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종종 일반 소설책이 아니라 그림책 같은 자유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레오 거스키가 글을 쓰는 장면에서 그가 많은 고민을 하며 글을 쓴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한 문장이 완성되기까지 한 페이지에 그 한 문장이 수정되어가는 과정만 보여지고 있다.
책장을 넘기며 나도 레오 거스키의 고민에 동참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감탄한 것은 레오 거스키와 앨마 싱어가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동안 각자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왼쪽 페이지에서는 레오 거스키가 오른쪽 페이지에서는 앨마 싱어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읽다가 읽어가면서 각 페이지가 서로 다른 사람의 생각임을 깨닫게 된다.
마치 내가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생각을 엿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구성들로 인해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조부모님들과 조너선에게 헌정했는데,
직접 조부모님들의 젊었을 때 사진 4장을 같이 붙여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의 등장인물들도 작가의 조부모들처럼 실제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느낌과는 별개로 헌정하는 사람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은 처음 봐서 굉장히 신선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먹먹함이다.
레오 거스키와 그가 사랑했던 앨마, 그리고 그들의 아들 아이작은 그렇게 셋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다.
폴란드로 독일이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치가 그들이 살던 마을의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시대에 떠밀려 자신들의 뜻과는 다르게 살아가게 되어버린다.
레오 거스키와 아이작이 생전에 한 번이라도 부자 관계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레오 거스키가 자신의 글인 '사랑의 역사'의 작가로 제대로 인정받고 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좋아한다.
행복하게 끝나야 중간에 어떤 역경이 있었더라도 마음을 놓고 안심하며 책을 덮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가 못하다.
끝이 너무 씁쓸하다.
레오 거스키와 앨마 싱어가 만나 서로를 위로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으로 위로받기엔 레오 거스키의 인생의 고단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도 계속 입맛이 쓰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브루노의 존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브루노를 레오 거스키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앨마 싱어와 만난 레오 거스키는 말한다.
브루노는 레오 거스키 자신이 글로 만들어낸 최고의 인물이며 있었던 적 없는 친구, 1941년 7월 어느 날에 죽은 사람이라고.
그 글을 읽으며 정말 놀랐다.
그리고 마음이 더 쓰려왔다.
그는 외로운 노년의 삶을 자신의 상상 속의 친구와 같이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씁쓸하다, 정말.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기 만을 다시 한 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