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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SF라서 글을 이해하려면 수학, 과학, 의학, 공학 지식이 수반되어야 했는데 내 부족한 배경 지식이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좀 더 알았다면 더 많은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냈을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사랑]은 제일 먼저 수록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또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작품이다. 다음은 책을 읽는 도중 메모한 내용이다.
* 가망이 없는 일은 체념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애쓰지 않은 자신을 책망할 일도 없다. 그러나 좀 더 애쓰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을 일을 포기한 사람은 더욱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마치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잉태로 인한 호르몬의 작용을 조작할 수는 없다. 그 호르몬 덕에 가상임신도 가능하고 그에 따른 신체변화도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런데 호르몬 작용은 비단 신체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정신작용, 이를테면 감정같은, 을 매우 크게 좌우한다.
* 호르몬의 작용으로 잉태한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내가 잉태하고 있는 것이 ‘아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내장 아니, ‘연인의 뇌’라니...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뚱아리가 만들어내는 감정과 이성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인큐베이터 쯤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
[내가 되는 법 배우기]는 쇠퇴하는 뇌를 불멸의 보석으로 전환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되기 전, 기능상 정점을 찍은 뇌의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보석이 대체한 나는 진정한 나일까? 두개골 속 뇌를 적출하는 순간 진짜 나는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버파이어]를 읽으면서 지금 세대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과학지식, 우주 작동 원리 등을 다음 세대들에게 부지런히 전해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알게 되었다. 인류라는 종의 선천적인 성향 때문에 미신과 교조적 종교로 혹세무민하는 무리가 넘쳐나게 된다는... 실제로 요즘 미국에 거주하는 유명인들이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던데, 소름이 쫙 돋았다.
이 밖에도 평행세계와 시간역전을 다룬 작품도 흥미로웠는데, 내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아쉬움이 크다.
‘나=나의 뇌’, ‘나=나의 뇌 속 신경 물질이 만들어내는 무엇’이라는 관점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 완독 후 종합 감상을 짧게 줄여 쓰자면, 나를 나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유익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