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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님은 "작별하지 않는다"하고 본인의 의지에 더 힘을 주시며 능동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다 읽고난 뒤에 "작별할 수 없다"의 피동적인 모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사실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과 공포가 같이 따라오며 항상 교훈적인 마무리로 나에게 남아 있다면 한강님의 소설은 공포보다 그 끝갈데 없는 아픔의 연속인것만 같다.
---내가 직접 본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살 아이가.(p87)---
이 문장을 읽고 난 꿈에 커다란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 얼굴위에 소복히 쌓인 눈을 치우며 얼굴을 확인하는 작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손이 추위에 곱아지며 점점 거칠어지는 느낌으로 깨곤 했다.
그리고 소설을 다시 읽게 되는 텀이 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궁금했고 다시 읽게 되었다. 끝으로 치달으며 그 어린 소녀가 부러진 성냥개비일망정 고동치는 꽃봉오리마냥 활짝 불꽃으로 삶을 살았다고 느꼈고 고마웠다.
작가님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소녀가 살아내고 인선의 삶과 경하의 삶의 밑바탕에 사랑이 없었다면 그런 행동을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내게 한강작가님의 소설은 인선의 잘라진 손가락의 신경이 계속 감각을 유지시키기 위해 바늘로 통증을 주어 온전한 손가락이 되게끔 해주는 것 처럼 바늘같은 소설이다. 외면하고 싶은 것들에 잊지마 하고 통증을 주는 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