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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얘기가 나올 때면 꼭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 걔 괴물 아니고 사람이야." 워낙 고전적으로 유명한 만화적 이미지가 강렬하게 인식되어 있긴 하지만 정확히 프랑켄슈타인은 괴물(피조물)을 창조한 연구자(창조자)다.
십여 년 전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괴물이라는 인물에 강하게 끌렸다. 재독을 하기 전까지도 나에게는 거의 괴물의 이미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괴물 너머의 인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지식에 대한 탐구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내면에 깊이 심취하여 결국 해서는 안 될 연구를 하고 만다. 바로 인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선택으로 인해 그는 사랑하는 이들을 차례차례 잃으며 자신의 목숨까지 떠나보낸다. 그는 분명 천재이며 온화한 성품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침식한 욕망을 꺼내어 표출하는 것에는 기이할 정도로 광기를 드러내보인다.
결말에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선장에게 빅토르는 절대 영국으로 선회하지 말고, 처음 의도했던 대로 저 위험천만한 여정을 헤쳐나가라고 그들을 독려 (일종의 분노로도 보였다) 한다. 그의 말은 얼핏 설득력이 있어 보였으나 선장은 결국 선원들의 뜻에 따라 안전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선장은 빅토르와 달리 자신이라는 개인의 욕망에 침체되지 않고, 선원들이라는 주변인들의 안위를 택한 것이다.
빅토르는 시종일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그가 창조해낸 괴물은 무수한 변화를 겪는다. 분명 사랑과 정겨움이 가득한 생명을 얻었으나 그는 곧 좌절을 겪고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행동하기까지 하지만, 이는 결국 끔찍한 고통으로까지 이어진다. 끊임없이 번뇌하며 내부의 격동을 미처 조절하지 못한 채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모습이 괴물인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갖게 만든다. 바로 그러한 모습 자체가 바로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여럿 죽인 살인마임에도 벌조차 받을 수 없다. 인간사회에서 그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빅토르를 파멸로 이끈 것은 이기심과 광기, 두려움이었다. 괴물을 파멸로 이끈 것은 외로움과 좌절, 잔인함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아주 기초적인 감정들이다.
시대상 과학기술이 비대하게 발전하며 그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로 이 소설이 읽히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제시하며 읽히기도 한다. 내가 책을 다 읽고 떠올린 한 문장은 "걔 괴물 아니고 사람이야." 였다. 이 말을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괴어다 놓고 그를 대해주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혹은 빅토르의 말처럼 그는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이며 그에 따라 위험을 초래하는 흉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공부를 하기 위해,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그러니까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은 가정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지만, 결국 그 홀로서기의 중심점은 가정에 단단하게 받치고 있어야 비로소 안정될 수 있음을 빅토르의 여정을 보며 생각해보게 됐다. 아쉽게도 나의 공감은 절반밖에 줄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 따뜻함만은 책을 읽는 내게도 일말의 힘을 주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중간에 며칠의 텀을 두고 읽은 탓에 좀 더 몰입감 있게 집중해서 읽지 못한 게 아쉽다. 그래도 오랜만에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흥미롭고, 빠르게 읽히며, 괴물의 존재가 생생하게 그려져 서늘한 감각이 들기도 했다.
제목에 프랑켄슈타인 이름을 적었으나 괴물의 박력이 소설의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빅토르와 괴물을 한몸으로 읽히도록 작가인 메리 셸리가 의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창조주의 이름(성)을 물려받는 것이 피조물의 법칙이므로 결국 그의 이름 역시 프랑켄슈타인으로 부름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걔 괴물 아니고 사람이야" 라는 누군가의 알은체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