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19p
그러나 그로피우스의 선언은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여학생 수가 학교의 신뢰도를 떨어뜨릴까 우려해 비공식적 여성 입학 할당제를 도입했고, 여학생들은 금속 및 가구, 건축 공방이 아닌 직조 공방으로 보내졌다. 적성이나 관심사보다, "목공은 무겁고, 건축가로서의 여성 교육은 적절치 않아서"라는 편견이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옛날 얘기만이 아니다. 서울대는 21세기 들어 비로소 음·미대 입시에서 남녀 구별없이 선발하기 시작했다. 1999년까지는 남녀 모집비율을 정해뒀었는데, 여학생들이 너무 많이 지원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폐습"을 없앤 것도 내부의 자발적 노력에서가 아니라, 1999년 7월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25p
살아남은 한 학생은 프리들의 수업에 대해 "모든 사람이 우리를 상자 안으로 밀어넣었지만, 그녀는 우리를 그 상자에서 꺼내주었다"고 돌아봤다.
26p
바우하우스의 이상이 미완에 그친 것은 전쟁 때문이다. 좀더 안정된 시대였다면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이상" "말로만 평등"을 앞세우며 세상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 한계 탓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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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
28p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
궁중의 여자들이 격식 차릴 때 입는 원삼이 서민들에게는 혼례일에나 허용됐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은 이날 보지도 먹지도 못했고, 심지어 걸어서도 안 되었다.
37p
<올드 코리아>, 냉엄한 국제 사회의 질서 속에서 자매가 남긴 조선과 조선 여인들에 대한 기록은 그 자체로 귀한 자료다. 이 자료는 타국에서 오래도록 이민 생활을 한 한국인들에게 발견되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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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
50p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거든요. 쉽게 나온 건 제가 그 전에 여러 개 해서 나온 거고, 사실 서너 번 죽지 않으면 그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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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성]
55p
"서울엔 저처럼 이사 다닌 사람들 많아요. 집 없는 서울시민이 겪은 일반적인 과정, 보편적인 경험인데 그에 대한 그림이 없다는 게 이상했어요.
56p
푸른빛으로 추상화된 기계, 스스로를 시각예술 노동자로 여기는 화가는 마치 20세기 초 스스로를 미래주의라 이름붙인 화가, 페르낭 레제처럼 낡은 자동차 엔진도 경쾌하게 화폭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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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야기와, 100년전의 조선의 혼례 풍습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좀 충격적이었어요. 노은님 작가의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더 찾아봤는데, 선에 생명력이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원시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네요. 1장의 여성 화가들은 모두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아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내가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같이 들었어요. 화가 분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하는 마음에 짧은 분량이 아쉽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