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
교육이란 무엇인가?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들에 대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나의 학창시절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인생의 성공은 명문대 진학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아 보인다. 십대의 학생에서 어느덧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버렸는데도 여전히 교육은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명문대 진학을 위해 특목고 입시 경쟁이 치열하고 학생들은 명문대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오늘도 열공중이다.
마치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기존의 사회 제도와 교육에 의해 고통받는 소년 한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너무나 순수하고 감수성 예민한 소년을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고 책임인가? 그 죽음은 단순히 한스 개인의 문제에 기인하는가? 왜 한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이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보게 된다.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인 슈발츠발트에 사는 한스 기벤라트는 총명한 소년으로 부모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의 기대에 힘입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마치 '개천에서 용 난다' 라는 말처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한스의 신학교 시험 합격과 입학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감수성 예민하고 내성적인 한스는 그렇게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도와 계획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너무 큰 기대와 부담감, 시험에 대한 불안 등으로 인해 그는 순수하고 소년같은 모습을 잃고 점점 야위어가면서 불안과 절망에 사인 채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하지만, 동정심 많은 교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한스의 불안한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다.
다행히 한스는 열심히 노력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여전히 불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더군다나 친구 하일너와의 만남은 인연이 아닌 악연이었다. 정말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게 될 정도로 하일너로 인해 한스는 점차 타락해가고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점점 변해져 간다. 하일너의 자유로운 영혼에 영향을 받아 한스 또한 자신을 억압하던 제도와 교육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또한 자신을 배려하고 챙겨주는 하일너의 관심과 애정 때문에 그는 하일너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이 기인(奇人)과의 우정이 한스를 지치게 만들었고, 때묻지 않은 자아의 순수한 존재를 병들게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가 울적해하고 슬퍼하면 할수록 더욱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자신이 친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자각이 한스를 한층 정겹고 으쓱하게 만들었다.
-p. 120
결국 한스는 하일너와의 관계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으로 오게 된다. 한때 기대주였고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그의 존재적 위상이 문제아와 마을의 수치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한스는 항상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이 항상 부러워하는 아주 높은 세계에 있었는데 이제 그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p. 172
고통과 고독에 내맡겨진 병든 소년 한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죽음' 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죽음을 통해 그는 비로소 해방되고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었을까.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서는 한스는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지쳐버렸고 사랑하는 연인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마치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말이다.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觸手)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짐짓 싫증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방금 누군가가 죽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p. 207
결국 제도와 전통의 권위와 교육의 강압에 깔린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그를 죽음으로 내 몬 사회와 교육의 잘못인 것이다.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교육과 성공이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공부하라고,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명문대 진학만을 강요하는 현재의 교육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 아이들 또한 나중에는 한스처럼 지쳐서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잔소리하는 공부가 우리 아이들을 깔아버리게 만드는 수레바퀴가 아닌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헤르만 헤세가 자랐던 시대에서도 그런 억압과 강요로 인한 교육이 만연했었고 그런 사회적 제도와 교육으로 헤르만 헤세 또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이 책의 주인공 한스의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의 자화상과 같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또한 이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헤르만 헤세가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가슴깊이 새겨야 할 때이다. 순수하고 감수성 예민한 우리 아이들을 공부를 인해 모든 꿈과 희망을 잃게 만들어서는 안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