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로베르트 발저가 오늘날 망실된 작가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카를 제리히의 돌봄 덕분이다. 제리히가 발저와 함께 떠난 산책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발저 전기를 위해 자료를 모아두지 않았더라면, 발저의 작품들을 편집해 선집으로 만들고 발저의 깨알같이 작아 읽을 수 없는 수백만 개의 글자가 쓰여 있는 유고를 갖은 노력을 다해 보존해두지 않았더라면 발저의 복권은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발저에 대한 기억 또한 십중팔구 사라져버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