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키터리지>는 보편의 이야기임에도 마음의 심연까지 들여다보이게 한다. 올리브를 중심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명을 들이대는 방식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각별히 생각해보게 한다. 그중 남편 헨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약국>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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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터리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에서 일하는 성실한 가장이다. 모두를 만족시켜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그는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의 남자다. 한편으로는 아내 없이 교회에 가면 가정 문제를 의심받을까봐 걱정하며 체면을 중시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조용히 긴장하면서 조심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순조로우면서 단조로운 일상에 데니즈 시보도가 등장한다. 그녀는 헨리에게 내적갈등의 중심축이지만 그러한 파열의 금은 분열을 예고하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바둑판의 유착처럼 한 인간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성장시킨다.
헨리의 아내가 말하듯 데니즈는 ‘당신 애인’ 정도로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헨리의 마음속을 열고 들어가면 데니즈는 여러 개의 잔상처럼 남아있다. 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귀여운 소녀를 보기도 하고,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우아한 여인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는 데니즈의 하루 일과를 상상하거나, 그녀의 눈을 통해 그려봄으로써 사랑을 느낀다. 느끼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판단과 결정에서 벗어난 통제 불능의 느낌 앞에서 인간은 무능할 뿐이다. 그러나 느낌의 인도는 삶을 매혹적인 경험으로 이끈다.
유부남인 주인공에게 애인의 존재는 금기이며 해방이다. 대부분 그들은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헨리에게 데니즈는 욕망의 충족보다는 선량한 의도를 통한 행복감에 맞닿아있다. 남편 헨리 시보도가 불운하게 죽은 뒤에는 젊은 미망인이 된 데니즈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데니즈가 헨리로부터 선물 받은 고양이를 차로 치게 되는데 올리브는 이 소식을 듣고 “당신이 고양이를 갖다 주지 않았으면 빌어먹을 고양이도 안 치었을 거”라며 냉소한다. 올리브가 말하는 고양이는 헨리가 데니즈에게 느끼는 연민과 애정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한발 더디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붙잡고 추억이라고 이름 붙인다. 헨리가 데니즈와의 추억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간혹 그녀에게 오는 카드 때문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지나온 뒤 데니즈의 카드에서 ‘사랑을 담아’라는 맺음말은 헨리의 남은 생에 고요하지만 격렬한 감정의 여운을 남길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불현 듯 찾아오는 데니즈라는 여진의 진동을 아내 올리브에게 고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움의 격렬한 파동에도 그는 의연하게 살아가야할 것이다. 그는 비밀로 봉인된 금기의 사랑을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만나며 죄책감의 그림자와 대면한다. 사랑한 죄에 대한 속죄로 사랑하는 삶, 죄와 벌의 전복이 결국 사랑과 맞닿아있는 삶의 비밀에 눈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삶의 긴장과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