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예수와 성서, 기독교적인 온갖 것들이 연상 될 수밖에 없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기독교적 관점이겠지만)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원하는지 미처 알지 못한 채 기도하기 때문에 그것이 현현되었을 때 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장님들과 같다.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상태들을 관찰하고 대화하며 연기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죽음은 뿌리가 같고 본원적이고 처음과 끝이다. 라고 읽었다.
또 한 가지 테마는 '여성'인데, 예수의 행적을 보면 '여인들'이 늘 등장했다. 텍스트에 없어도 있었다. 누가 밥을 해주고 주가 빨래를 해주고 수발을 들었단 말인가? 그 점도 예수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페렐라는 세 단어의 앞글자를 딴 말이라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또 천주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3년 동안 자궁에서 있었다는 것은 공생활이전의 사생활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죽은 다음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하늘에 무언가 나는 짐승(하얀독수리)가 보였다고 하는 것도 부활과 승천을 말하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구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깊고 심오하든, 일상에서의 작은 구원이든, 해방이든, 성장이든.
다만, 재미있는 발상은 연기같은 존재가 어떻게 신발(장화)을 신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신의 현현은 물리적 세계에서 제한과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망상이나 상상의 존재가 아닌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것으로서의 상징, 구체화한 현신으로서의 상징, 인간과 신의 연결고리로서의 상징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더더욱 예수란 존재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필부들에게는 신비스러운 존재로 남았으며 결코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연기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겠다라는 생각도 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 백이면 백 모두 가지는 형상이 다르듯이. 초월적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인식적 한계를 위해서도 말이다.
해설에서는 연기를 가벼움으로 해석했는데,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가벼움이란 존재론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휴면, 후무스 또는 흙이니까 인간은 신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도 하니 아이러니 하다.
작품이 씌여진 시대가 근대와 산업화가 시작되고 번성되기 시작할 무렵인 것을 생각하면 그 시대에도 현대의 모순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현대라고 하는 요즘도 여전히 근대의 중흥기 또는 융성기를 지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형식적인 면에서 연극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익숙치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다는 것은 아니며, 끝없이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연극을 본 것과 같은 기분이 되기도 했다. 형식이 주는 미학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 속에 든 생각은 "굳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