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하면 떠오르는 달뜬 문장 없이, 낯선 곳에서 ‘살아’내는 고되고 외로운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문장들. 화려한 뉴욕을 담았으나 쓸쓸하고 적막한 호퍼의 그림과 닮았다. 책을 읽으며 피렌체를, 파리를, 프랑크푸르트를 헤매며 ‘집에 가고 싶다‘와 ‘아름답다’ 는 혼잣말을 오가던 지난 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르노 강변에 감탄하며 걸어다니다가도, 저녁이면 중국 음식점서 허기를 채우던 복잡한 감정들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내 집에서 홀로 살다가 공동 임대 주택으로 들어가 낯선 이들과 복작이는 일상, 크고 작은 인종차별 사건, 모국어가 아닌 언어 사용의 답답함과 오해들. 여행하면 떠오르는 환상과 달리 타국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기대와 긴장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거나 매몰되지 않고, 뚜벅뚜벅 하루하루 집중해나가는 모습이다. 기자인 작가의 필체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시종 차분하고 과장없이 단단하다. 읽어나갈수록 부푼 마음이 가라앉고 현실로 돌아와 다리에 힘을 주게 된다. 직시, 행동만이 줄 수 있는 각성이다.
오래 살아온 도시를 떠나야 할 시기 읽게 된 이 책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일’ 앞에서 조금 더 용기를 내 봐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쉽지 않겠지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고여서 썩는 쪽 보다는 부딪쳐 깨지는 쪽을 택하기를. 걷는 법, 나는 법은 반드시 깨지고 나서야 배울 수 있으므로.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서 죽고 싶어질 때도 있을 테지만 견뎌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그렇지만 너는 견더낼 거고, 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느 날, 네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태양이 떠오를 거야. 그리고 넌 네 자신이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나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될 거야. 오직 너만의 것인 사람 말이야. 그리고 깨닫게 될 거야. 여기가 네 삶이 있는 곳이라는 걸.”
덧) 40세가 되도록 작품 한 점 팔지 못한 에드워드 호퍼가 이토록 유명한 작가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세핀이라는 영리하고 헌신적인 아내 덕분이었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이지 않는 여자들’ 중 하나인 조세핀도 이번 기회에 슬쩍 언급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