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치솟는 가운데서도 영사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 스크린에선 계속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금복은 마침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자들의 모습이 스크린 위에 겹쳐져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본능처럼 문득 자신의 딸, 춘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춘희가 아직도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보듬어주지 않았던 딸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모든 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스크린에까지 불길이 옮겨붙었다. 한때 보잘것없던 산골의 한 소녀였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거대한 영화가 눈앞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졌다. 그의 눈앞엔 오래전 그가 고향의 언덕에서 맞이하던 적막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낙조 속에서 마을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언덕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으며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