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이 잠시라도 흐트러지면 길을 잃을 수 있는 작품이라, 쪽수에 비해 읽는데 공수(?)가 상당히 많이 드는 작품이다. 배경이 되는 미국 사회, 문화에 대한 지식 부족뿐 아니라 예상 자체를 할 수 없는 기이한 전개 방향과 낯선 구조 때문이다.
책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테마파크에서 선사시대 동굴 인간을 흉내 내며 사는 이들(패스토럴리아), 종교에 미친 여동생을 쫓아내기로 작정하고 자기 계발 강의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윙키), 죽은 이모의 시체와 만나는 퇴물 스트리퍼(시오크), 하루 종일 여자만 생각하며 머리가 작네 몸이 크네 헛소리를 해대는, 중년이 되도록 독립을 못 한 이발사(이발사의 불행) 등이 나온다. 요약된 문장으로 어떤 소설이 상상되는가? 접어두라. 그 상상은 이 소설과 한치도 맞지 않을 것이니. 주인공들이 해대는 맥락 없는 독백과 괴랄한 전개를 읽고 있자면,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읽기를 여러 번 멈췄다가, 멈춘 부분부터가 아니라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런데 신기하다. 이 헛소리 같은 소설을 꾸역꾸역 다 읽고 최대치로 상승한 혼란스러움이 한 풀 꺾이면,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된다 싶은 문장들은 그야말로 우리의 삶을 날 것으로 담은 현실 그 자체였구나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회사의 불합리한 처사 속 동료를 내치고 나서야 배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정리해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 내 인생 꼬인 게 종교에 미친 여동생 때문이라는 피해의식을 갖고 살지만 결국 여동생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는 자 오로지 성실하고 착하게 살았지만 얼토당토않게 죽어버린 자, 오고 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오만가지 외모평가를 해대면서도 정작 중년이 되도록 독립도 못 한 자. 부조리로 만연한 세상 속 무능력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다름아닌 우리의 이야기다. 픽션 속 설정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 한들, 현실만큼 비현실 적인 것이 없음을 꿰뚫는 작가의 통찰력과 기발함은 놀랍기 그지없다.
천지분간 못하는 개망나니의 술주정인 줄 알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접신한 무당의 칼춤이었던 조지 손더스의 단편집.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를 생각보다 술술 읽어 겁도 없이 잡았다가 식겁했다. 오랜만에 독서 자세 칼각으로 바로잡고,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 믿었던 벽 하나를 시원하게 깨부순 경험까지 덤으로 한 시간이었다.
조지 손더스 몰아읽기는 (다소 두렵습니다만…)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