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9일 밤>
책의 제목부터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거기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나는 작가, 살만 루슈디의 개인사까지 알게 되면 더더욱.
그가 자신의 작품 '악마의 시'로 인해 이란의 호메이니에게서 '파트와'를 선포당했고
그로 인해 긴 시간 동안 도피 생활을 할 수 밖이 없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USA 투데이에서 살만 루슈디는 세에라자드처럼 생사를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다 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실이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쓰길래?
이 이야기가 다루는 시간은 정말 길고도 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만 페리, 즉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하는 두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마족이
한 인간 남자를 사랑하고 그를 그리워한 기간만 해도 800년 정도다.
그 시간 속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들이 대체로 2년 8개월 29일 동안 진행되곤 한다.
예를 들면 위대한 철학자 이븐 루시드의 귀양 기간이 그랬고,
미스터 제로니모가 라 인코에렌차에서 일하기 시작한 날로부터 그의 아내가 그곳에서 벼락을 맞기까지의 기간이 그랬다.
이 소설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것은 여마족 두니아가 800여 년의 세월 동안 세계에 퍼져있던, 자신과 이븐루시드 사이의 자손들 중
몇 명을 모아 인간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흑마족을 무찌르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을 보면 표지에 그려져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몇 백년 쯤은 우습게 휙휙 지나가는 시간들과 현실에서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묘사,
거기다 마구 쏟아져 나오는 듯한 느낌의 많은 등장인물들로 인해 어리둥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고 나면 그 이야기의 흐름에 저절로 떠내려가듯 술술 읽힌다.
'아라비안나이트'가 동화 속 이야기 같은 느낌이라면 이 '2년 8개월 28일 밤'은
그런 동화 같은 느낌이 현재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듯, 묘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의 결론에 이르르면 '아! 이것은 우리의 세상에 대한 동화적인 은유였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조금은 직접적으로 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허황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소설에서
현실적인 교훈이 떠오르는 모습, 거기서 받은 충격 아닌 충격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두려움은 결국 사람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고, 두려움이 사라지자 비로소 신을 폐기처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내려놓듯이, 혹은 젊은 남녀가 부모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당당히 새 가정을 꾸리듯이.
이 소설에서는 마족만이 나올 뿐, 신은 따로 나오지 않는다.
마족에는 흑마족과 백마족이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여마족 두니아는 백마족의 공주이고 여왕이다.
그런 그들이 여러 사정으로 인간 세상에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 혹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한다.
따로 마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야말로 오랫동안 인류를 규정하는 서사였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 예컨대 인종, 지역, 언어, 관습 따위는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체로 만족한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겠다.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현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을 적절히 잘 섞어서 펼쳐놓는 살만 루슈디의 글은 매혹적이었다.
살만 루슈디의 문제적 작품인 '악마의 시'도 상, 하권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던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