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살갗을 찢어 낱낱이 해부해버린다. 보지 않아도 될 내장 속 시꺼먼 부분까지 기어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실패라는 경험이다. p.183/256 (전자책 기준)
나를 필요한 사람이라고 얘기해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상품에 불과했다. 나보다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하고 예쁘고 존재감 있는 애들은 넘쳐나게 많았다. 두 번에 걸친 데뷔조 발탁과 또 거듭되는 탈락이 내게 알려준 진실은 내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며, 나의 가치를 똑바로 바라봐야지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는데, 이상하게 도톰하고 못생긴 곰곰의 곰손이 내 손 위에 포개질 때마다 나는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었던 현실이 실은, 헬륨을 넣은 풍선처럼 이리저리 정처 없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현실은 전혀 정제되어 있거나 아름답지 않으며, 일상에 연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이라는 사실을. p.192/256 (전자책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