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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묘비와, 나의 새색시와, 땅 밑에 묻힌 K의 새 유골을 비교하며 운명의 질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후 다시는 아내와 함께 K의 묘에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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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亡友에 대한 그런 감정은 언제까지고 지속되었습니다. 실은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동안 염원해온 결혼마저 불안 속에서 식을 치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제 앞길을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인지라, 어쩌면 이 결혼이 나를 심기일전시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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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남편으로 아침저녁 아내와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내 가냘픈 희망은 냉엄한 현실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가도 불현듯 K에게 위협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중간에서 K와 나를 자꾸만 연결시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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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아내의 기억 속에 까만 점을 찍을 수 없었기에 털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순백색 위에 까만 잉크를 한 방울이라도 가차없이 떨어뜨리는 짓은, 내겐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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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이 지나도록 K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늘 불안했습니다. 이 불안감을 떨쳐버리고자 책에 파묻혀 살려고 애썼습니다. 맹렬한 기세로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목적을 만들어놓고 억지로 그 목적이 달성될 날을 기다리는 건 허상이기에 유쾌하지 않습니다. 나는 도저히 책 속에 마음을 파묻을 수 없었습니다. 또다시 팔짱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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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버지에게 속았을 당시의 나는, 남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절실히 느끼긴 했지만, 남만 나쁘게 여길 뿐 자신은 그래도 틀림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어떻든지 간에 나 하나만은 나무랄 데 없는 인간이란 믿음을 어딘가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K의 일로 그 믿음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어질어질해졌습니다. 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나는 자신에게도 정나미가 떨어져 활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