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16
요컨대 나는 정직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딘 바보였습니다. 아니 교활한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것은, 그때까지는 하늘과 내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서는 당장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끼인 나는 또다시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185/216
머릿속으로 K와 나를 나란히 비교해보니 K가 훨씬 더 훌륭해 보였습니다. ‘나는 계략으로 이기긴 했어도 인간적으로는 졌다’라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습니다. 그때 필시 K가 나를 경멸했을 거라는 생각에 혼자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K에게 가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자존심상 큰 고통이었습니다.
185/216
그때 내가 받은 첫 느낌은, K한테서 별안간 사랑의 고백을 들었을 때와 거의 흡사했습니다. 내 눈은 그의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자마자 마치 유리로 만든 의안처럼 움직일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질풍처럼 나를 통과한 다음 나는 아아, 큰일났다, 하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검은 빛이 무서운 기세로 순식간에 내 미래를 뚫고 내 앞에 가로놓인 전 생애를 뒤덮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