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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한 획 한 획이 그어질 때마다 펜 끝에서 소리가 납니다. 나는 되레 차분한 마음으로 종이 앞에 앉아 있습니다. 익숙지 않아 펜이 딴 데로 빗나갈지는 모르겠으나,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펜이 제멋대로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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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향을 피우기 시작한 순간뿐이듯, 술맛을 느끼는 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뿐이듯, 사랑의 충동에도 이런 아슬아슬한 자극의 순간이 시간 위에 존재한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일단 그 순간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는 만큼 친밀감만 더해갈 뿐, 사랑의 신경은 점점 마비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