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그 깨가 눈에 들어온 순간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 다는 것입니다. 해인씨가 그래도 깨를 뿌린 음식을 한 번은 먹었구나. 깨라는 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 뿌리려면 안뿌 릴 수 있는데,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도 아니라면 해인씨가 뿌렸든 남이 뿌렸든 어쨌든 깨를 뿌린 음식을 먹긴 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는 것. 집에 가서도 얼마간 불안 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방 한구석에 떨어진 깨를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아니 너무 미안해하 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 깨라니. 그 얘길 전해들으 면서 어쩐지 시시하다 생각했고 참 슬펐습니다.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p.124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걸었다. 땀이 조금 났고 유 진씨 말대로 기분이 좋았다. 돌아보니 너무 오랜만이었다. 유진씨와 길을 걷는 것, 그러니까 전에 없이 마음 편히 걷는 것. 다만 걷는 일일 뿐인데도 이렇게 오랜만일 일인가, 몇 년 간 그러질 못하고 지내왔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러기 싫 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된 것 같았다.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