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고지를 덮었다. 선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내 얼굴과 선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 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 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더 무니없이 치명적이고 통렬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 약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 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p.130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 될 것이다. pp.1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