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곧이어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 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의 어떤 부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 었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관통해야만 세상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는, 그리고 한번 결론을 도출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절대 수 정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것 (이면 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p.126
어쩌면 이런 식으로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방 안에서 일어 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일 까? 그 당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불장난을 하며 느꼈던 그 아연실색할 만큼의 쾌감과 과민할 정도의 선명한 감정들,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그 감각들(불장난과 관련된 그 모든 기승전 결!)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p.127
허상? 아니다. 허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 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 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 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pp.127-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