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에야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고, 책장에서 한 장도 쓰지 않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중 가 장) 두꺼운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 그런 후에는 숨겨놓은 라이터 도 꺼냈다. p.115
허공에 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 그 장면은 눈앞에서 선명하고 집요하 게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p.120
타들어가며 날아가는 종이를 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화상 한번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불길은 절대 내 신체나 정신에 위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p.120
바로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수치심 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 이것이 내가 무모하고 치명적이게 타들어가는 종이를 보며 끝도 없이 머 릿속으로 되뇐 말이었다.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