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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않았던인세가 오늘 통장에 입금됐다. 인세라는 것은 사악한돈이다. 분명히 내가 책을 써서 번 돈임에도 마치 공짜로 받은 돈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짜로 생긴 돈의 운명이 어찌될는지는 물으나마나다. 흥청망청 탕진이다! 자,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서점을 향해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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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탕진에도 그 나름의 규칙이 있다. 무작정 아무렇게나 쓰는돈이라면 '낭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탕진은 우선 계기가 중요하다. 책으로 인세를 탕진할 작정이라면 책에서 영감을 얻은 탕진이라야 자기합리화로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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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탕진은 무엇보다 충동적이어야 한다. 계획을 세우거나 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아보는건 반칙이다. 그러나 아무책이나 사는것도안 된다. 온라인서점에서 사는 것도 진정한 의미의 탕진이라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여서점에 가야한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오늘 내가탕진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적극적 인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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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책이라는 물건을 탕진할때도 목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야한다. 이게 탕진과낭비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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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탕진은 세상 모든 탕진 중에서 가장 값진 소비다. 그래서 나는 늘 탕진과 낭비를 엄격하게 나눈다. 낭비는얻는것 없이 그저 버려진다. 후회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책 탕진은 소비라기보다 투자다. 게다가 수익률이 엄청나게 높은 투자종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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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좋아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대개 책의 물성자체를 즐긴다는걸알수있다. 일단은 내가 그렇다. 책을 읽는다는건 글자를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감으로 한꺼번에 느껴야 즐겁다. 책의 물성을 좋아하는에서가를 분류해보면 크게 세 종류다.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 책사는걸 즐기는 사람, 그리고 책쌓아두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내가본에서가중에 이 세가지 속성을 모두 가진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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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서 지금은 그 숫자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상당히 특별한애서가의 네번째 부류를 소개하겠다. 이들은 책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며 자칫상할수도있는 표지와 본문을 보호하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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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이 네번째에서가야말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부류이며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진정한 책의 수호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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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를 자처하는 손님들과 심도 깊은 토론을 거친 후, 드디어 결과발표다. 가장 흔한 재료지만 내구성이 낮아 책 보호에 적합하지 않은 신문지가 총점 11점으로 5위다. 4위는 12점을 받은 영화포스터다. 책 싸는 용도로는 달력보다 좋지만 지금은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이걸로 책을 싸는건 사치에 가깝다. 공동 2위는 각각 13점 을 얻은 달력과 비닐을 돕는다. 비닐은 장점이 많지만 책을 망가뜨릴수있다는 최악의 단점도 가지고 있다. 달력은 책 보호에 장점이 있지만 표지가 가려진다는 점, 그리고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데에서 감점이 있었다. 1위는 유산지다. 점수는 무려 15점! 일반적인 종이보다 약간 비싸다는 단점이 있긴하지만 책을 잘 보호할수 있고 반투명한 재질이라는 게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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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회과학서점에서 책을 싸주던 이유는 책을 보호하기보다는 그 책을 가진 사람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컸다. 대학교 앞에 작지만 훌륭한 서점들이 자리잡고 있던 그때, 학생들은 철학과 사회과학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책들은 대부분 국가에서 정한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런 책을 드러내놓고 읽으면빨 갱이 취급을 받았고, 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붙들려가기도 했으니까 책표지를 가리는건 최소한의 방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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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때 잘나갔던사람들 얘기를 유심히 들어보면 어떤 패턴이 있다. 한때 잘나갔던사람들끼리 몰래 모여서 무슨 클럽 같은 걸 만들어 서로 입을 맞추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토리가 비슷하다. 그리고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왜 한때 잘나갔던 분들이 헌책방에 자주 돌아다니느냐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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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렴."
과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다운 짧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삶이란 혁명가나 성인의 일생처럼 거창한게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진지하게 살아가는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 생활이 모여 삶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은 철학을 가졌다고 말할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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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나갔던사람은 많다. 그러나 한 시절 잘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로 잘살았던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잘산사람은님이 알아주길 바라는 삶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 A씨는 사르트르가 한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렇게 살았던가보다. 그럴 때가 있다. 언어로 일깨우는것보다 마음 으로 전해지는게 더 진실한순간이다. 이낡은 책을 선물받을 누군가에게도 A씨의 그런 마음이 잘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