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침대로 올라서서 격자창을 잡아 뜯어 연 그가 창틀을 잡아 흔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힌 채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들어와! 들어와!” 그는 흐느꼈다. “캐시, 제발 들어와. 아, 제발! 한 번만이라도! 아! 내 가장 소중한 사람,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줘. 캐서린, 이번만은 제발.”
유령은 유령다운 변덕을 부려서 거기 있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사납게 회오리치는 눈과 바람이 내가 서 있는 데까지 불어와서 촛불을 꺼 버렸다.
미친 듯한 울부짖음과 북받쳐 오르는 비통함에 너무나 쓰라린 고뇌가 묻어났으므로, 나는 동정하는 마음에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아 넘겼다. 엿들었다는 사실에 반쯤 화가 나고, 우스꽝스러운 악몽 이야기를 늘어놓아 그런 고통을 불러일으킨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그 자리를 피하기는 했지만, 내 꿈 이야기가 왜 그를 비탄에 빠뜨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_p.61_
히스클리프는 말이 없고 참을성 많은 아이 같았습니다. 아마 학대를 견디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일 거예요. 힌들리가 두들겨 패도 눈도 꿈쩍하지 않거나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며 참아 냈고, 제게 꼬집혀도 마치 자기가 잘못해서 다쳤으니 남을 탓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들이쉬고는 눈만 끔벅끔벅할 뿐이었어요.
히스클리프가 이렇듯 참아 냈기 때문에 주인 나리는 당신의 아들 힌들리가 그 불쌍한 고아를 ― 그렇게 부르셨지요 ― 괴롭힌 걸 아시면 몹시 화를 내셨답니다. 그분은 이상하게 히스클리프를 편애하셔서 그 애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믿으셨지요. (아닌 게 아니라 말이 없는 편인 그 아이는 말을 했다 하면 대개 사실을 이야기했거든요.) 그래서 유난히 말썽을 부리고 고집불통인 캐시보다 히스클리프를 더 귀여워하시게 된 겁니다. _p.80_
“넬리, 나 좀 보기 좋게 만들어 줘. 나도 점잖아지고 싶어.”
“진작 그랬어야지, 히스클리프.” 제가 되받았습니다. “너는 캐서린 아가씨를 속상하게 했어. 장담하건대, 집에 왜 돌아왔지 하고 후회할 거야! 모두들 아가씨만 대단하게 생각하니까, 네가 시기하는 것 같아 보이지 뭐야.”
그는 캐서린을 ‘시기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속상하게 한다는 말은 분명히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_p.117_
그러나 이제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는 건 내 지체를 낮추는 일이 되고 말았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걔가 절대로 알면 안 돼.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넬리,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걔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아. 그런데 린턴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이 다르듯 우리와 달라.” _p.154_
내가 이 세상에서 맛본 크나큰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가 당한 고통이었어. 처음부터 그 고통 하나하나를 지켜봤고 겪어 냈지. 살아오는 동안 내 생각의 가장 큰 몫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 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되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내가 그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거야. 린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기쁨으로서가 아니야.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_p.157_
하지만 그 행복도 곧 끝났어요. 글쎄요, 인간은 결국에 가서는 자기 본위가 되는 건가 봅니다. 유순하고 관대한 사람들의 이기심이 자기 맘대로 쥐고 흔들려는 사람들의 이기심보다 조금 더 정당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상대방이 내 이해를 주된 관심사로 삼지 않는다고 서로 느끼게 됐을 때 행복한 결혼의 막은 내린 겁니다. _p.176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