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화된 권력 역학(p22)이란 말이 나온다. 이를테면 그림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 남성들은 그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작품을 주문하고, 화가는 거기에 맞춰 그린다. 그림 속에서 여성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주체는 그림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진 남성들이다. 그림 속 여성은 그들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화가 또한 자신이 원하는 그림보다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많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체가 되어 그것을 휘두를 때 나머지는 공모자나 그 대상이 될 뿐이다. 주체적인 <수산나>를 그렸던 '아르테미시아'도 때로는 남성들이 보고자 하는 방식(여성을 대상화)으로 작품들을 그렸다고 한다. 생활고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런 가부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당당한 주체로서 보고 표현하기 위해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더 많은 새로운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보는 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사회의 여성인 내가 주체적으로 보고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대상화된 여성을 그린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던 너도, 성애화된 여성 아이돌의 광고를 보며 찬양하던 너도 이 책을 읽는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