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보다 더 나이든 듯했고, 마치 달이 자기보다 어린 지구를 비춰주듯 그들의 갈등과 행복과 회한을 차분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그들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활기도 패기도 약동하지 않았다. 그동안 타인과의 교제에서 오는 즐거움도, 야성적이고도 남자다운 건강한 활력도 자식으로서의 효심도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고 지내온 터였다. 그의 영혼 속에는 그저 차갑고 잔인하고 비정한 육욕만이 꿈틀거렸다. 그의 어린시절은 죽었거나 실종되었고, 그와 더불어 소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혼도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황량한 껍데기만 남은 달처럼 삶의 한가운데를 표류할 뿐이었다. p.155
파넬이 죽었다. 성당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도 장례 행렬도 없었다. 그는 그때 죽는 대신 엷은 막이 햇빛을 받아 녹아 없어지듯 다만 사라졌을 뿐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는 실종되었거나 존재의 영역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셈이었다. 죽음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사라지거나, 우주 어디에선가 길을 잃어 사람들에게 잊혀서 존재의 세계를 벗어나고 말았다는 생각은 얼마나 이상한가! p.156